“저희 아버지가 68세 때, 어머니가 43세 때, 12명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중학교 2학년 때 중풍으로 쓰러지셔서 학교를 그만두고 뱃사람 식모로 일하다, 17살에 상경해 쌀집 배달, 공장, 식당 설거지, 타일 보조공, 기와 공장 보조공, 양아치, 옷, 양말 행상, 노숙자, 거지생활, 노상강도, 폭력배 안 해본 일이 없다."
"어느날 예배당에 끌려 가 밤새도록 기도했다. 통성기도를 하는데, 그때 강사 목사님 말씀이 소리가 아니라 불로 느껴졌다. 그때, 전국 교도소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겠다고 기도했고, 그 기도대로 됐다.”
저서 <영화 같은 이야기>, 사마리아 교정 선교회 대표목사, 법무부 교정위원, 교도소 집회 25년간 1,500번이 넘는 설교, 국내외 부흥회와 간증집회로 잘 알려진 고봉준 목사의 LA 지역 부흥회가 지난 4월 10일(수) 샘커뮤니티교회(샘신 목사)를 시작으로, 14일(주일) 주백성교회(김성규 목사)와 웨스턴교회(진건호 목사)에서 진행되었다.
고봉준 목사는 이번 집회 설교에서 “예배의 가장 큰 목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세계관, 가치관이 변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에 하나님이 계신다. 가치가 바뀌면 진정한 예배자로 바뀐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 22:4)”며, 예수를 만나게 된 사연과 믿음 후에 그의 삶에 나타난 변화를 간증했다.
그는 12명의 자녀의 막내로 태어나 중학교 때 아버지를 여의고 험난한 삶을 살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 세상에 우연은 없다. 현실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하나님 뜻대로 살면 반드시 복된 길은 열린다. 주일성수, 기도, 봉사, 전도와 선교, 십일조와 감사 생활, 하나님 뜻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빗나가는 법이 없다”고 간증했다.
“저는 교도소 사역을 97년도부터 했다. 사례비를 받고 설교를 한 게 천 번이 넘고 자비량으로 생선장사를 하면서 13년 동안 연단을 받았다. 하나님이 정한 시간까지는 훈련을 시키신다. 그때부터는 부흥회를 보내기 시키기 시작해서 외국 부흥회만 4백 여번을 했다”며, “성도가 한 명이라도 부흥회를 한다, 한 명이나 천명이나 만명이나 똑같이 설교한다”고 했다.
그는 생선장사를 하며 자비량으로 했던 재소자 사역을 돌아보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치는 시간과 돈이 아깝다고 생각하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게 아니다. 생명도 내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예수 믿기 전의 삶은 짐승 같은 삶, 인간 이하의 삶이었다. 하나님이 없으니, 마귀가 제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저를 낳고 83세에 돌아가셨다. 중학교 중퇴를 하고 고기잡이 배에 식모로 취업했다. 17살에 서울에 올라왔다. 구두닦이를 하다 나에게 친한 사람들이 없을까 친구를 찾다가 교도소에 들어갔다. 그 방에서 예배를 드렸다. 긴급조치 9호, 김대중 대통령, 김지하 시인, 서울대학교 정외과 4학년 학생들이 그 안에 있었다. 그때 사형수가 ‘주여,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는데, 죽음을 앞두고 어떻게 감사한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았지만, 예배를 드리고 밖에 나오면 여전히 같은 문제에 봉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그가 주님을 만난 것은 37년전 오산리 기도원 대성전 밑 지하성전에서였다. 회개 안하려 버티다가 주님을 만났지만 말씀이 없으니 봥항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는 꽃게잡이 배를 탔고, 자살시도도 했다. 그는 그 기간을, “모든 문제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시려고 일부러 두신 장애물이다. 장애물도 기도하면 하나님이 해결해주신다”라고 해석했다.
“예배를 드리고 밖에 나오면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직장이 없고 가정이 없었다. 그러다 어떤 생활까지 했냐면 거지생활을 했다. 거지 막사에서 넝마주이를 하며 살았다. 그 생활을 하면서 너무 외로워서 25살 때, ‘넝마주의와 살아줄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술집에 가서 술집 아가씨를 데리고 도망갔다. 거지 막사에 데려가서 83년 11월 25일에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바라보는데 흙수저 중에서도 흙수저로 태어난 아들이 불쌍했다. 영락교회 부목사님에게 오셔서 돌예배를 드려 달라고 부탁했다. 비오면 비가 새는, 쓰레기 더미 속에 지은 거지 막사 속에 와서 그분이 오셔서 펑펑 울며 기도하시며 예배를 드려주셨다. 3개월 동안 씻기지도 못한 아이를 위해 기도하셨다. 그 목사님이 빈 평화와 복이 28년 후 응답되었다.”
그는 아이를 호적에 올리지 못해 입양을 보냈고, 부랑자의 삶은 계속되었고, 출소 후 막사로 들어갔다.
“하나님의 시간이 있다. 기도 응답도 하나님의 시간 속에 있다. 경륜과 섭리가 있다. 22살 때 예수님 앞에 서원했는데, 그 생각이 계속 났다. 회개하려 하는데 회개가 안되었다. 30대가 넘어 기도원에 와서 3일동안 기도하는데 불가항력적인 거부할 수 없는 은혜가 임했다. 거지 막사 앞에 있는 교회에 매일 가서 새벽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거지 근성을 뽑아내려고 13년 동안 생선 장사를 하게 하시고 광야 훈련을 시키셨다.”
2011년 3월 아내가 그가 입양을 보낸 아이가 아버지를 찾는다는 전보를 내밀었다. 고봉준 목사는 그때는 망치로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28년만에 편지가 왔다. ‘사진 한 장과 제가 쓴 책을 동봉합니다. 아버지를 찾았다는 것이 너무 기쁩니다. 다시는 아버지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하는 삶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행복한 아들 Nicholas Daniel Hartlep, 고모일 드림.’ 고모일은 내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28년 만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쓸 내용이라고는 ‘용서해라’는 말 밖에 쓸 말이 없다. 미네아폴리스에 도착해 아들을 만나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고봉준 목사는 아들과 3일을 같이 보내며, 양부, 장인 장모를 모두 만났다. 또, 한국에 온 아들은 돌 예배 때 안수기도해 준 목사님에게 다시 안수기도를 받았다.
그리고 한국 교도소에서 아버지가 설교하는 것을 본 아들은 그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험한 삶을 살아왔지만 하나님은 그를 만나주시고 두번째 기회를 주셨고 그는 목회자가 되셨다. 그는 세계를 다니면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고봉준 목사는 돌 예배 때 목사님이 한 기도가 어떻게 응답되었는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들이 쓴 책이 29권이다. 아들은 2006년 위노라 주립대를 수석 졸업, 2012년 위스콘신 주립대학교 밀워키 캠퍼스에서 수석 졸업, 메트로 폴리탄 주립대학, 켄터키 주립대학 베레아 칼리지의 로버트 찰스 장학관의 석좌교수 겸 교육학과장을 역임하고 있다.”
고 목사의 간증에 이어 웨스턴교회 진건호 목사가 기도회를 인도했다. 진건호 목사는 웨스턴교회는 시작된지 2개월 정도 되었다며, 앞으로 훌륭한 강사를 초청해 집회를 이어갈 계획이라고 전했다. 집회는 서정길 목사의 축도로 마무리됐다.
고봉준 목사의 다음 집회 일정은 다음과 같다.
4월 17일(수) 오후 7시 남가주 은혜선교교회(김창곤 목사, 300 Vallejo Dr. Glendale, CA 91206)
4월 19일(금) 오후 7시 We Bridge 교회연합 집회 (더 섬기는 교회-김영길 목사) 605 S. Palm St. #H, La Habra, CA 90631
4월 21일(주일) 오전 11시 가스펠교회(김정호 목사) 11520 La Mirada Blvd, La Mirada, CA 90631
4월 21일(주일) 오후 3시 더 섬기는 교회 (김영일 목사) 605 S. Palm St. #H, La Habra, CA 90631
4월 26일(금)~27일(토) 콜롬비아 리오아차 순복음교회(김주영 선교사)
4월 28일(주일) 콜롬비아 보고타 순복음교회(김주영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