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잃고도 43년간 의료선교 계속
여성 의료인 양성과 약자 치료 헌신
근대 의료 발전과 장애인 복지 공헌 

초창기 국내 선교사였던 故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 의료 선교사가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다. 사후 73년 만의 뒤늦은 수상이다. 

감리회 소속 로제타 홀 선교사는 지난 1890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으로 처음 입국해 1933년까지 무려 43년간 여성과 어린이, 장애인 등 약자들을 주로 돌보면서 의료 선교사로 헌신한 공로로 수상했다.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로제타 홀 선교사는 1894년 평양에 국내 최초 맹학교 평양여맹학교(평양맹아학교 전신)를 설립했고, 뉴욕 점자를 한국어에 맞도록 고쳐 한글 점자를 만들어냈다.

1928년에는 현재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설립했고,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의 전신인 동대문부인병원 설립에도 기여하는 등 여성 의료인 양성과 사회적 약자 치료에 헌신한 공로가 인정됐다. 

이 밖에 우리나라 최초 여성 전문병원인 보구여관을 비롯해 평양 기홀병원, 여성 치료소인 광혜여원, 동대문부인병원 등의 설립과 활동을 주도했다.

또 한국 최초 여성 의료인인 박에스더를 의사로 양성하는 등 근대 의료 발전, 장애인 복지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평양외국인학교, 인천간호전문보건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100주년기념교회가 관리하는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내 양화진홀에는 그의 육필 일기 6권이 소장돼 있다. 그의 <로제타 홀 일기> 6권은 영인본으로 발간됐다.

지난해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할 당시, 구한말 여러 선교사들과 함께 로제타 홀 선교사의 이름을 언급한 바 있다.

훈장 수여식은 보건복지부와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이 5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장에서 개최한 '제52회 보건의 날 기념식'에서 진행됐다.

훈장은 로제타 홀 기념관장인 강경신 인천기독병원 원목실장이 대리 수상했다. 이 훈장은 가족과 함께 안치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보관된다.

보건의료인의 자긍심을 높이고 노고를 격려하기 위해 마련된 이번 기념식에서는 유공자 총 250명이 국민 건강증진과 보건의료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박상은 원장 (샘병원. 4기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장)
▲故 박상은 원장.


또 지난해 안타깝게 별세한 故 박상은 안양샘병원 의사도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그는 샘글로벌봉사단을 설립해 매년 소외 이웃 1천 명에게 주말 무료 진료를 제공하고, 아프리카미래재단을 설립해 아프리카 극빈 지역에서 에이즈 예방 사업, 영양강화 사업을 추진하는 등 평생 의료봉사에 앞장섰다.

이 외에 국내 최초 독감백신 공장을 건립하고 지난해 2,980억 원 상당의 일본 알레르기 치료제를 수출하는 등 국내 바이오 산업 글로벌 경쟁력 강화 및 육성에 기여한 이병건 (주)지아이이노베이션 대표이사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간이식 수술 세계 최다 집도의(8500회 이상)로 간이식과 간담도외과 분야에서 세계적인 연구 성과를 이룬 이승규 서울아산병원 석좌교수는 국민훈장 목련장을 각각 수상했다.

구영 서울대 치의학대학원 교수는 27년간 우리나라 구강 공공보건 의료 발전과 국민 구강건강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옥조 근정훈장을 수상했다.

이와 함께 옥순주 대한약사회 전라남도지부 자문위원, 최선주 고려대학교 구로병원 간호부장, 최남섭 대한치과의사협회 고문, 고성규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교수, 김동익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등은 국민포장을 받았다.

다음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 설명하는 홀 선교사 가족의 사역 소개.

윌리엄 홀은 캐나다 벽촌의 가난한 집안 출신에 자수성가로 의대를 마치고 의사가 됐다. 뉴욕 빈민가에서 의료봉사를 하면서 만난 의사 로제타와 약혼했다. 약혼녀인 로제타는 먼저 한국 선교를 위해 들어오고, 윌리엄은 약혼녀보다 1년 늦은 1891년 들어와 두 사람은 서울에서 결혼했다.

부부는 1894년 평양 개척의 중책을 맡고 아직 한 살이 안 된 아들과 함께 평양으로 향한다. 온갖 핍박 속에서도 이들 부부는 의료봉사를 하면서 교회를 개척했다.

1894년 평양에서 벌어진 청일전쟁 후 부상자들과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던 윌리엄은 자신도 결국 전염병에 옮는다. 뒤늦게 서울로 와서 아내의 돌봄을 받았지만, 1894년 11월 24일 한국 입국 3년 만에 아내의 품에서 순직한다. 이때 아내 로제타는 임신 7개월이었다.

29세에 남편을 잃은 로제타는 미국으로 돌아가 딸 에디스을 낳은 후, 두 자녀를 데리고 1897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평양에 남편을 기념하는 '기홀 병원'을 세우고 직접 부인과장으로 일했다. 이때 사랑하는 딸 에디스도 이질로 희생되는 고통을 겪었지만, 그녀의 헌신은 계속됐다.

로제타는 김점동(나중에 박에스더라 불림)이라는 여성을 미국에 데리고 가서 의학 교육을 시켰다. 박에스더는 의학 공부를 마치고 한국 최초 여의사가 됐다.

로제타는 한글 맞춤법에 맞는 점자법도 개발해 최초의 시각장애인 학교를 세웠으며, 여성 의사와 간호사를 양성하는 일에도 헌신했다. 남편과 딸을 잃으면서도 그녀의 헌신은 43년이나 지속됐다.

로제타의 아들 셔우드 홀은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역시 의사이던 부인 메리언과 한국에 와서 16년 동안 의료 선교를 했다. 그는 특히 폐결핵 치료 전문가가 됐는데, 이모처럼 따르던 박에스더가 폐결핵으로 희생됐기 때문이다.

셔우드 홀은 해주에 최초의 폐결핵 요양원을 세우고 환자들을 돌본다. 당시 폐결핵 환자는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된 채 비참한 생활을 감수해야 했는데, 셔우드가 이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뻗은 것이다.

셔우드 홀은 한국 최초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어 결핵환자들을 도운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1940년 크리스마스 씰로 독립자금을 모았다는 등 일제가 꾸민 간첩 혐의로 체포됐다가 겨우 풀려나 한국을 떠나게 된다. 한국을 떠나기 직전 미국 선교본부로부터 인도에 의료 선교사로 가라는 서신을 받았고, 그와 가족들은 곧바로 일본으로 가서 인도로 향했다. 셔우드 홀 부부는 인도에서 1963년까지 결핵 퇴치운동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