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로 있으면서 선교에 대한 깊은 회의감이 몰려온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았던 과하티케 부족의 움볼디 마을은 원래 천주교 지역이었습니다. 그들의 천주교 신앙은 토속 신앙에 녹아 버렸기에, 천주교가 가지고 있는 원래의 신앙 색깔이 매우 퇴색해버린 상태였지요. 천주교 지역만 아니라, 움볼디 지역 주변의 다른 부족들에게 뿌리내린 개신교회 또한 같은 현상이었습니다. 마치 한국 기독교가 무속신앙에 의해 기복신앙으로 변질된 것과 마찬가지였지요. 이런 현상이 우리가 살던 지역만 아니었습니다. 파푸아뉴기니 전역이 그런 상황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천주교의 영향권 아래 있던 움볼디 지역에 개신교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에는 마을 노인들이 완강하게 개신교를 거부했었는데, 더 이상 그들의 권위가 통하질 않았지요. 마을에 영적인 역사가 일어나면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변화에 민감한 젊은이들이 도시에 나갔다가 주일 예배를 드리러 개신교회 방문을 감행(?)했습니다. 이전에는 성당으로 향했던 발길을 이제는 개신교회로 돌리기 시작한 거지요. 개신교회에 대한 호기심이 급증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개신교회를 방문한 그들에게 제대로 복음을 가르치지 않은 채 목사로 세워서 마을로 돌아가 교회를 열게 한 겁니다. 게다가 이런 마구잡이식의 선교를 다수의 교파가 자행했다는 거지요. 그 바람에, 약 2000명 정도 밖에 안되는 부족 사람들이 사는 약 열두 개 마을에 여덟 개의 개신교 교회가 들어온 겁니다. 당연히 마을 간에, 그리고 가족 간에 갈등이 생겨, 인척 간에도 말도 걸지 않는 기현상이 벌어졌지요. 이전에는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는데 이제는 불편한 사이가 되어 버린 거지요. 이런 현상에 대해 그들은 예수님 핑계를 대더군요. 예수님 때문에 부모와 자식 간에 반목이 생길 거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런 현상은 당연한 거라는 논리로 말입니다. 얼마나 그럴 듯한 변명인지요!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내가 그 교회들을 방문해서 예배에 참여하면서 설교하는 내용을 들어보니, 거의 예외없이 자기들의 교회가 정통이고 다른 교회들은 아니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복음은 없고, 교회 선전만 가득했습니다.
한번은 도시에 가서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한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마침 그 교회에서 자기들 교파가 얼마나 많은 교회를 개척했는지 그 숫자를 보여주며 자축하더군요. 그런데 그 숫자에는 바로 우리 마을에 있는 교회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기껏 말씀으로 훈련시켜 놓은 형제들에게 목사 직위를 주고서 마을로 보내 교회를 시작하게 만든 그들이었습니다. 이런 현상이 한국 선교 뿐만 아니라 서양 선교에서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었기에 선교를 왜 하는 것인지 강한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런가 하면, 선교사 자신의 성숙함 또한 선교 현지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더군요. 다시 말해서, 본국 교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불미스러운 일들이 선교 현지 선교사 사이에서 또는 현지 사역자에게서 발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 자신도 참 미숙한 상태로 선교지에 와서 미숙한 선택을 한 아픔들이 있었습니다. 결국에는 선교사로 나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성숙한 선교를 할 수 있는 선교사를 배양할 수 있는 교회 기반이 약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판이 건강하게 만들어져야 건강한 모가 심어지는 이치와 같은 거지요.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듯이 말입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새는 거지요.
나는 한국 사람으로는 파푸아뉴기니에 파송받은 첫 번째 성경번역 선교사였습니다. 당시에 인도네시아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 가정이 있었구요. 그런데 후에 선교지로 간 나의 성경번역 프로젝트가 그분보다 더 빠르게 진행이 되더군요. 그러다 보니, 내 속에 이런 욕심이 생겼지요. “이런 속도면, 내가 한국 선교사로서 다른 나라 성경번역을 완성한 첫 번째 선교사가 되는 것 아닌가?”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