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볼 산에서 건너다 보이는 언덕 위의 나사렛은 평온하고 한적하다. 그러나 막상 시내로 들어가면 시끌벅적하다. 고요나 명상과는 거리가 먼 도시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관통하는 도로를 운전하다 보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퉁명스럽게 내뱉던 나다나엘의 말이 이해가 된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애굽을 거쳐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왔다. 예수님은 30여 년을 그곳에서 사시다가 48km 떨어진 갈릴리 호수 북단의 가버나움으로 이주하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다. 마태는 이 모든 일들이 다 구약에 예언되어 있다고 말한다.
왜 예수님의 고향이 나사렛이었을까? 나사렛은 이스라엘의 북쪽에있는 변방이다. 그래서 앗수르 같은 북방 나라로부터 대를 이어 고통을 받았다. 예루살렘을 황금빛으로 묘사한다면 나사렛을 중심으로 한 스불론과 납달리 땅은 칠흑 같은 어두움이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오실 것을 이사야는 7백여 년 전에 이렇게 예언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 9:1-2).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갈릴리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이방의 갈릴리”라는 말은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사는 갈릴리 지역’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남쪽의 유대인들로부터 종교적 차별을 당하고 변방의 고통을 대물림하는 어둠의 땅에 빛으로 찾아 오셨다. 피곤하고 낙담하여 주저앉아 있는 백성들에게 새 생명을 주는 큰 빛으로 오셨다. 멸시당하던 가버나움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찾아오셨다. 지금도 예수님은 어두운 그늘 아래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춰주신다.
오래전에 《따라 따라 예수 따라가네》라는 제목의 책을 읽었다. 크기는 작았지만 감동이 깊었다.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던 이듬해, 1908년에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William M. Baird) 부인 애니 베어드(Annie L. Baird)가 쓴 소설 같은 실화다. 베어드 선교사 부부는 1891년에 한국에 와서 지금의 숭실대학교 전신인 숭실학당을 세웠다. 베어드 선교사 가족들은 모두 한국 땅에 묻혔고 가족의 기념비가 지금도 서울 양화진에 남아 있다.
그 책은 ‘보배’라고 불리는 열두 살 된 여자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의 형식을 빌렸지만 충분히 있음직한 이야기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보배는 열두 살에 자기 부모가 미리 돈을 받은 집으로 열 살짜리 남편에게 시집가서 식모 노릇을 한다. 18세에 첫 딸을 낳은 지 여섯 달 후에 남편이 갑자기 죽게 된다. 그러자 시집 식구들은 돈을 받고 보배를 방만식이라고 하는 술꾼에게 팔아버렸다. 새끼줄로 결박당하여 종처럼 끌려가던 날 천연두를 앓고 있던 어린 딸마저도 죽고 만다. 방만식의 여종 같은 아내가 된 보배는 하루가 멀다고 몽둥이로 얻어맞으며 살아간다. 그 집에는 방만식의 늙은 부모님과 사별한 전처의 소생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 아이는 천연두의 후유증으로 눈이 멀었다.
이야기 중에 심 씨라는 무당이 나온다. 사람 해골에 이슬을 받아다가 명약이라고 비싼 돈 받고 팔아먹으며 온갖 악한 일을 다 하는 무당이다. 그리고 그 무당을 따라다니며 북을 쳐주는 사람, 고판수가 나온다. 고판수는 멀쩡한 눈을 뒤집어 흰 부분만 보이면서 앞 못 보는 봉사라고 사람들을 속인다. 심 씨처럼 귀신이 내려 무당 노릇도 하고 돈을 벌고 싶었던 그는 굴에 들어가 36일을 굶어도 보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아 안달을 한다.
가난을 음식 삼아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들, 딸자식을 팔아먹는 사람들, 천연두가 오면 자식들의 떼죽음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무당이 가장 무서운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 술 취한 남편에게 짐승처럼 얻어맞으면서 사는 아내들, 그래서 남편이 일찍 죽기를 신령에게 비는 아내들, 남편을 죽일 길이 없으니까 자기가 죽을 방법을 생각하며 깊은 강물을 쳐다보는 아내들, 그 아내 중의 한 사람이 바로 보배였다.
그런데 어느 날 보배가 선교사님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게 된다. 남편이 그녀를 묶어 놓고 몽둥이찜질을 해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보배를 때리는 일이 지겨워진 만식이가 결국에는 아내를 따라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다. 만식이는 보배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나를 떠나고 싶다면 남은 재산을 쪼개어 쓸 만한 집 한 칸을 마련해주겠소. 만일 떠나지 않고 남아준다면, (목이 멘 채로) 내 꼭 약속하겠소. 절대 손찌검 안 하고 따뜻한 손길만 주겠소.”
마침내 보배네 가정이 회복된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고판수의 아내 거시기가 예수님을 믿게 되고, 빚 독촉에 고통을 당하던 고판수가 어느 날 광에서 목매달아 죽으려던 찰나에 자기 부인을 통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다. 동네 사람들이 너도나도 예수님을 믿게 될 무렵, 무당 심 씨는 무당 예복을 차려 입고 일부러 예배당에 나와서 훼방을 놓는다. 그러나 고판수가 무당 심 씨를 위하여 대신 회개하며 기도할 때에 성령의 능력이 무당 심 씨에게 임한다. 심씨는 혼비백산하여 무당 옷과 부채와 방울을 내던지고 집으로 도망간다. 그리고 며칠 밤낮을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끙끙 앓다가 성도들의 기도로 치료를 받고 마침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다. 심 씨는 무당 노릇하는 데 쓰던 모든 기구들을 마당에 내어다 불사르고, 그 마을의 교회 지도자로 거듭나게 된다. 심 씨는 심지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기도 한다. 책을 보면 심 씨의 사진이 크게 나오는데 손가락에 끼고 있는 굵은 은반지 두 개가 눈에 들어온다. 마침내 온 동네가 예수님을 믿고, 산 위에 있는 빈 절간을 허물어다가 교회를 건축할 때에 심 씨는 그 은반지를 내어놓는다. 칠흑같이 어둡던 그 마을에 큰 빛이 임하였다.
베어드 부인이 이 책을 쓴 지 110년이 되었다. 그때와 비교해볼 때 세상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이제 심 씨 같은 무당은 사라졌을까? 가정 폭력은 사라졌을까? 정말 그때보다 나아진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가? 우리는 사망의 그늘을 벗어났는가? 아니다. 2천여 년이 지난 지금도 세상은 어둡기만 하다. 서로가 서로를 멸시하고 학대한다. 무당과 점쟁이를 의지해야 살아갈 정도로 자신감을 상실했다. 모두가 인생의 변두리를 맴돌고 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지금도 찾아오신다. 빛으로 찾아오신다. 누구에게나 그 빛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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