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으로 알려진 유스티누스(100-165)는 그레고 로마인이다. 유스티누스는 학문에 심취했다. 수사학(인문학), 역사, 그리고 시를 공부했고, 다양한 철학을 공부했다. 다양한 철학을 섭렵한 그는 30세쯤 되어서 기독교에 입문했고 기독교를 변증하였다.
그는 당대에 보기 드문 인문학자였다. 당시 수사학이라 칭했던 웅변술은 인문학이었다. 그는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많은 글을 남겼다. 모두 기독교를 변증하는(호교하는) 중요한 자료다. 하지만 거의 소실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제 1변증서>, <유대인 트리포와의 대화>다.
유스티누스는 그리스 철학의 로고스에 관하여 그리스도교적으로 설명한 최초의 그리스도교 철학자다. 그는 그리스의 우주적 로고스를 그리스도에 연계시키는 독창적인 사상가였다. 그는 자신을 철학자라고 주장하면서 철학자들이 입는 외투(pallium)를 걸치고 순회 설교자로 돌아다니면서 기독교 복음을 증거 했다.
그의 이론은 후대 기독교 변증가인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 테오필루스(Theophilus), 터툴리안(Tertullian), 펠릭스(Minucius Felix)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또 유스티누스는 이단들과 논쟁도 주저하지 않았다. 유스티누스의 이단에 대한 단호한 태도는 영지주의(Gnosticism)와 군주신론(Monarchianism), 사상에 대항했던 후세의 변증가 헤게시푸스(Hegesippus), 이레나이우스(Irenaeus), 히폴리투스(Hippolytus), 에피파니우스(Epiphanius)등으로 이어진다.
유스티누스의 고향에 관한 정보는 약간 모호하다. 먼저는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의 수가성 인근이라는 주장이 있다. 또 다른 자료는 플라비아 네아폴리스 태생이라고 주장하는데, 어떤 자료는 사마리아 지방에 세워진 플라비아 네아폴리스에서 태생이라고 한다. 이렇게 두 지명을 통합한 것이 그의 출생지라고 본다.
그는 스토아주의(Stoicism), 소요학파(Peripateticism), 피타고라스학파(Pythagoreanism), 그리고 플라톤주의(Platonism)를 섭렵했지만, 그의 내적 갈증은 해갈되지 않았다. 진리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들을 추구하는 이런 철학들에 대한 공허함을 가진 유스티누스는 132년 가이사랴 바닷가를 거닐다가 한 노인을 만났다. 그 노인은 유스티누스가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플라톤의 생각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유스티누스가 만난 노인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이 없다. 아마도 유스티누스가 당시에는 그 노인의 가르침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다 후일에 자신의 변화 과정을 확인하며 그 만남을 정리한 듯 하다. 여하간 그 노인은 철학자들 또한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않은 이성을 통해 완전한 영적 진리에 이를 수 없다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았던 이스라엘의 고대 선지자들에 대해 알려줬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언했다. 유스티누스는 그의 말을 듣고 기독교 진리를 수용하였고 개종했다.
전승에 의하면 유스티누스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에도 철학자로 자처했다. 유스티누스는 과거 자신이 플라톤 철학자임을 내세웠던 것처럼 스스로 그리스도교 철학자 혹은 그리스도교에 관한 철학자임을 주장하였다. 150년경에 그리스도교를 가르치기 위해 로마에 도착했을 때 그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호교론자(기독교 변증가)였다. 사실 그를 기독교 역사의 첫 호교론자(변증학자)로 보는 교회사가들이 많다. 아울러 그는 평신도 호교론자였다. 그는 이방인 철학자들과 논쟁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로마에서 철학 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철학 학교를 통해서 철학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물론 철학자를 전도하는 통로는 토론이었다.
유스티누스는 순회교사로 여러 지방을 다니며 토론을 즐겼다. 그는 132년~135년 사이 에베소에서 유대인 트리폰과 종교에 관한 토론을 했다. 이 대화 내용을 155년에 책으로 엮어 펴낸 것이 <트리폰과의 대화(Dialogue with Trypho the Jew)>이다. 그가 로마에 머물며 당시 로마의 황제인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편견에 의한 박해를 목격하고 그 억울함을 호소하며 기독교 교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한 것이 <제1 변증서>과 <제2 변증서>인데 현재는 <제1 변증서>만 남아 있다.
유스티누스는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가 유대인들의 논리에 편승해 기독교를 핍박하는 것을 우렸다.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는 성품이 비교적 온순하고 기독교에 대하여 관대한 입장이었는데 유대인들의 거짓 증언을 믿고 기독교를 박해하려 했었다. 그러나 유스티누스의 변증서를 읽고 감동되어 체포된 기독교인들을 석방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유스티누스는 안토니우스 피우스를 이어 로마 황제가 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165년경에 박해를 시작하자 황제의 박해를 막아 보려고 변증서를 다시 작성해서 황실에 보냈다. 물론 황제에게 이런 문서를 보내는 것은 목숨을 담보할 수 없는 위험한 일이었다. 결국,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황제는 유스티누스의 변증을 수용하지 않았다.
유스티누스는 견유학파 철학자 크레센스라는 사람과 논쟁을 벌이다 크리센스의 사주로 체포되었다고 전해진다. 간교한 크레센스는 유스티누스가 황제가 아닌 다른 주(Lord)를 섬긴다고 로마의 총독(혹은 집정관) 유니우스 루스티쿠스(Junius Rusticus)에 고발했고, 총독이 유스티누스를 현장에서 체포했다.
유스티누스는 유니우스 루스티쿠스(Junius Rusticus)총독에 의해 6명의 동료 기독교인과 함께 체포되었다. 황제(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총독(유니우스 루스티쿠스)의 심문을 받으면서 유스티누스는 흔들림 없는 신앙을 고백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황제의 신전에 희생제물을 바치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많은 고문을 당한 후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