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명화 국군포로가족회 대표가 12일 (사)자유통일연합이 주최한 '북한 인권 개선과 자유통일 세미나'에서 국군포로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손 대표는 '대한민국은 국군포로들을 버렸다'는 제목으로 토론하며 "1943년 휴전회담 당시 유엔군 사령부는 국군 실종자를 8만 2천 명으로 추산했다. 북측은 당초 포로를 수만 명 잡았다고 선전했지만, 전후복구건설 등에 노동력을 동원할 목적으로 그 수를 터무니없이 줄였다. 이에 따라 북측이 최종 인도한 국군포로는 8,343명에 그쳤다. 이후 최소 5만 명이 북한에 억류돼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1953년이후 1964년까지 11차례에 걸쳐 포로송환문제를 논의했지만, 아무 진전이 없었다"고 했다.
손 대표는 "국군포로는 정전협정 후 노동력으로 짐승 같은 생활이 시작됐다. 전쟁 복구 건설에 1953년부터 1956년 3년 기간 안전성건설대가 조직됐고, 집단생활을 강요받았고, 반항하는 이는 공개 총살당했다. 이후 1956년 5월 11일 김일성은 정무원결정 43호를 명령하며, 포로가 된 10대 20대 국군포로에게 북한의 (공민증) 신분을 주고 평생 부려먹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국군포로를 '해방전사'라고 칭하며, 포로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고 했다.
이어 "국군포로들은 '노역을 했으니 고향에 돌려보낸다는 약속을 지켜 달라'고 요구했지만, 북측은 귀환을 희망한 포로를 모아 놓고 기관총을 난사하는 참변을 벌였다. 그럼에도 국군포로의 반항이 지속되자, 탄광 입구 터널에 잡아두고 발파를 하기도 했다. 또 북한은 러시아에 빌린 무기 값을 갚을 수 없어 국군포로를 러시아 벌목으로 약 2만 명 정도 보냈고, 수용소가 비좁다는 이유로 국군포로에게 기관총을 난사하고 호수에 시체를 넣기도 했다. 이처럼 국군포로의 신세는 파리 목숨 같았다"고 했다.
방북한 김대중 대통령, 풍산개 2마리만 안고 와
손 대표는 "1994년 조창호 중위가 탈북하며 북한에 국군포로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 북한 방문으로 국군포로를 데리고 갈 것이란 한가닥의 희망을 가졌지만, 대통령은 풍산개 2마리를 안고 왔다"며 "대한민국이 우리를 버렸다는 절망으로, 70세 고령으로 가다 죽더라도 조국으로 가야 된다는 결심으로 탈북을 하여 2010년까지 80분이 왔다"고 했다.
그는 "국군포로분들은 90세가 넘어 한 해 한 해 돌아가시고 이제 남한에 12분 살아계신다. 10대 20대 어린 나이에 책가방 대신 총을 잡고 전쟁에 나갔다가 행방불명, 실종, 총살당하고 정치범수용소에 가서 죽는데, 국가의 책무, 정부의 책임은 잊혀져 갔다. 이에 그리움, 애타는 마음으로 절규한다"며 "국군포로는 국가의 책무다. 조국을 위해 전쟁터에 나선 군인을 찾는 것이 정부의 도리이며 의무"라고 했다.
그러면서 "목숨 걸고 국군포로를 보호하고 예우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당연한 의무라 간직하고, 북한에서 실종, 총살, 정치범수용소에 잡혀간 뒤 행적도 모르는 그들의 생사 확인과 실상 조사를 하고 명예회복을 해 주는 것은 당연하다"며 "국민들이 아오지탄광에 대해 알 듯, 국군포로를 기억해 주시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