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광 목사(월드쉐어 USA)
(Photo : 기독일보) 강태광 목사(월드쉐어 USA)

백년 전쟁이 막바지에 치달은 때 헨리 5세가 죽었습니다.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귀족들은 선왕의 업적을 기리며 어린 왕자를 새 왕 헨리 6세로 세웠습니다. 당시 헨리 6세는 겨우 아홉 살이었습니다. 어린 왕을 위하여 두 사람이 섭정을 펼칩니다. 왕 헨리 6세의 숙부 글로스터(Gloucester) 공작과 당시 영국 종교계의 실권자인 윈체스터(Winchester) 주교입니다.    

이 두 실권자의 갈등과 반목이 너무 심했습니다. 이들의 반복과 갈등을 빌미 삼아 권력을 잡으려는 귀족 친척들이 합세해서 영국 조정은 복잡했습니다. 이런 사실이 헨리 6세에게 알려지고 왕은 국력 소모를 우려하며 분쟁을 멈춰 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 프랑스는 샤를 황태자가 샤를 7세(Charles VII)로 왕위에 즉위하면서 국가를 정비하고 있었습니다. 샤를 7세는 프랑스의 영국령을 다수 점령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의 장교 탤벗 경이 프랑스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에서는 그제야 프랑스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대책 마련에 부산을 떨었습니다.   

프랑스는 비록 영국군에서 영웅시하는 탤벗(Talbot) 경을 체포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건재를 과시하는 솔즈베리(Salisbury) 장군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목자의 딸이었지만 신의 계시를 받아 조국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는 잔 다르크가 나타나 프랑스의 승리를 장담하였습니다.   

프랑스군의 포로가 된 탤벗 경은 영국의 포로가 된 프랑스 귀족과 포로 교환으로 석방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영국의 영웅 솔즈베리 장군은 잔다르크의 프랑스군에 전사하였습니다. 탤벗은 자신의 상관 솔즈베리 장군을 군막에 모시고 자신이 솔즈베리의 뒤를 잇겠다고 맹세를 하였습니다.    
프랑스군은 영국의 장군을 죽이고 승리를 거둔 공로를 잔 다르크에게 돌리며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프랑스 군대가 승리와 파티에 취한 상황에 탤벗은 지치고 배고픈 영국군을 이끌고 오를레앙 싸움에서 대승을 거둡니다. 탤벗 경이 유명세를 타게 되자 탤벗을 향한 유혹과 공격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탤벗경은 유혹도 공격도 이겨냅니다.    

탤벗은 다시 프랑스 북부 도시 루앙을 공격하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에 잔 다르크는 탤벗의 힘을 약화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것은 프랑스 귀족으로 헨리 6세의 외삼촌으로 탤벗을 돕고 있는 부르고뉴(Burgundy)공작을 유혹하여 프랑스로 되돌아와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프랑스 귀족으로 조국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던 프랑스군의 요청을 수용했습니다.   

부르고뉴 공작은 헨리 6세에게 조국 프랑스의 황폐함과 동포의 처절한 비탄을 묵과할 수 없어서 조국을 도와야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가 샤를 왕에게 돌아가는 것은 헨리 6세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헨리 왕은 분노하여 외숙인 부르고뉴 공작을 배반자로 규정하고 철저하게 응징하라고 탤벗에게 명령했습니다.   

런던의 귀족들은 법조항을 놓고 논쟁을 벌입니다. 이 논쟁은 특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요크 가문의 플랜태저넷(Plantagenet)은 백장미 기를 들고 나왔습니다. 반면에 랭커스터가 서머싯(Somerset)은 홍장미 기를 들고 나왔습니다. 양대 세력은 추종자를 모으고 팽팽한 기싸움 중이었습니다.    
프랑스 파리로 원정을 떠났던 헨리6세는 본국에서 벌이지는 일을 들었습니다. 왕은 친척인 그들의 분쟁이 영국군의 힘을 약화시키는 일이라고 강조하고 서로 화목할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가문의 대표인 요크와 서머싯에게 새로운 임무도 부여했습니다. 요크는 영국 군대 사령관으로, 서머싯은 영국군 기마 부대 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요크와 서머싯의 갈등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작전 중이었던 탤벗 장군은 보르도 성 앞에 도착하자마자 큰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곳에서는 이미 포격 준비를 마친 1만의 프랑스군이 기다리고 있었고 뒤에는 샤를 군대가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탤벗 부대는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탤벗은 급히 부하를 요크에게 보내 기마병을 요청하였습니다. 요크는 기마병 사령관인 서머싯에게 기마병을 보내라고 요청하지만 서머싯이 시간을 지체하면서 영국군은 패배하였고 결국 탤벗과 그의 아들 존(Jhon)이 전사하였습니다. 이 패배로 헨리 5세가 어렵게 얻었던 땅도 잃었습니다. 탤벗의 죽음은 요크와 서머싯 두 귀족의 씻을 수 없는 수치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런 악연들이 쌓여서 장미전쟁이 될 것은 두 가문은 몰랐을 것입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지루한 전쟁은 파괴적이었습니다. 로마 교황청도 두 나라의 화해를 종용했습니다. 프랑스의 샤를 왕은 영국과의 화친 의사를 표현하고 기다리는 중에 잔 다르크가 영국 군대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요크와 서머싯의 연합군은 프랑스의 영웅 잔 다르크를 붙잡고 그녀를 심문했습니다.    

잔 다르크는 자신의 지조를 굽히지 않다가 화형을 당했습니다. 이 무렵 서픽 백작은 프랑스 시골에서 미모의 마가릿(Magaret)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서픽은 그녀와 헨리 6세의 결혼을 추진하였습니다. 왕의 숙부 그로스터경이 헨리 왕은 이미 프랑스 샤를 왕의 친척과 약혼했다며 만류했으나 왕은 마거릿과 결혼을 했습니다.   

이상은 백년 전쟁의 마지막과 장미전쟁의 서곡을 알리는 셰익스피어의 <헨리 6세 1부>입니다. 이 작품으로 셰익스피어는 본격적으로 역사극을 저술하게 되었다고 알려집니다. 이런 역사극을 셰익스피어가 쓰는 것을 당대의 지식인들은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긴 것은 셰익스피어의 학력이 미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어린 왕을 잘 보필하지 못하고 권력투쟁을 벌이는 귀족이 영국의 문제였음을 지적합니다. 계속되는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중에도 개인과 가문의 욕심을 추구했던 영국 귀족의 소아적 이기심을 고발합니다. 인간의 추악함과 초라함은 극복하지 못한 이기심 때문이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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