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방배동 예장 백석 총회회관 6층, 오기원 목사는 불 꺼진 복도 맨 끝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와 기자를 맞이했다. 가까이 가니 문 앞에 '뉴서울교회'라는 글자가 붙어 있었다. 이곳은 오 목사가 뉴서울교회 자신의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작은 사무실에는 책상과 4인용 식탁과 의자, 책장 등이 있었다.
오정현 목사 장남인 오기원 목사는 지난 5월 14일 다문화권 교회를 표방하는 뉴서울교회 '탄생예배'를 드렸다. 이 날은 오 목사의 40번째 생일이라고 한다. 예장 합동의 대표적 교회 목회자 아들이 예장 백석 총회회관에서 개척을 시작하고 김장환·김하나 목사 등이 참석했다는 소식에, 설왕설래가 이어지고 있다.
화려하게 사역을 시작한 오기원 목사는 어떤 생각을 갖고 한국에 왔을까. 그는 의외로 선뜻 인터뷰에 응했다. 질문에 대부분 영어로 답했고, 차윤경 예배간사가 통역했다.
오기원 목사는 오정현 목사의 사랑의교회 부임 후에도 미국에 남아 UC 샌디에고(2007, B.A.)와 탈봇신학교(2012, M.Div.)를 나왔고, 애너하임 남가주 사랑의교회 영어권 목사, 오렌지카운티 빌립보교회 담임목사 등을 지냈다. 다음은 오기원 목사와의 일문일답.
한국 사역, 부르심 응답하기 위해
개척 자체에 포커스 있는 건 아냐
사람들 뭐라든 제 관객은 단 한 분
-서울 강남에서 개척을 시작하는 등 소위 '금수저 개척', '아빠 찬스'라는 논란이 있다.
"개척에 대해, 사람들이 다양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제가 한국에 와서 사역을 하기로 결심한 것은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이지, '개척' 자체에 포커스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우려가 당연히 있으리라 예상했기 때문에, 한국에 몇십 년 동안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답할 수 있고, 제게는 '부르심이 전부'다.
하나님께서 미국에서 사역하던 중 한국에 대한 마음을 계속 강력하게 주셔서 몇 개월간 기도했고, 부르심에 확신을 느껴서 지금 여기 있는 것이다.
20-30대에는 사역에 특정한 방향이 있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의 사역에 대한 생각 또는 그러한 시선들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역을 하면 할수록 느끼는 것은, 잘하든 못하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사역은 사역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뭐라 하든 제게 관객은 단 한 분이시고, 그분께서 어떤 독특한 목적으로 저를 부르셨기 때문에 제가 여기에 있다."
▲(왼쪽부터) 뉴서울교회 탄생예배에서 김하나 목사, 오정현 목사, 장종현 백석 총회장, 김장환 극동방송 이사장이 기도하던 모습. |
미국선 아버지 아무도 신경 안 써
한국서 축복받으며 사역 시작해
받은 복 흘려보내야 한다는 생각
-미국에서의 사역은 어떠했나.
"미국에서는 여러 나라 사람들과 사역했기에, 제 아버지가 누군지 몰랐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축복을 받으며 사역하게 됐으니, 받은 복을 흘려보내야 한다는 생각도 있다.
그런 부분에서 미안함도 있지만, 그 미안함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모든 조건들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미국 남가주 사랑의교회에서 10년 넘게 중고등부 사역을 했다. 거기서는 (그 교회를 개척하고 떠난) 아버지의 아들이라 더 어려웠지만, 다음 세대에 대한 마음이 있었기에 떠나지 않고 사역했다. (사역 전) 어린 시절부터 몸담은 교회였기에 목회자로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기도 했지만, 사명 때문에 계속 있었고 행복했다.
2018년쯤 개척도 했다. 주로 노숙인들이나 젊은이들을 섬기고자 했다. 그때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지 않고 모든 것을 혼자 해결했다. 그때는 제가 좀 시킨대로 하지 않는 고집(stubborn)이 있다. 지금 그 교회는 없다. 사역자가 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개척 후 3-4년 간 매우 어려웠지만, 제게는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지금 핵심 멤버들 중에도 그때 제자훈련했던 이들이 있다. 제 목회철학은 제자훈련이다."
한국인과 세계인 다리 역할 희망
국내 외국인 투명인간 같다 호소
생각 달라도 서로 대화로 소통을
-국내 영어 사용자들이 주 목회 대상인가. 사실 사랑의교회에도 영어 예배가 있고, 서울에만 교회가 1만 곳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 굳이 시작하는 이유는.
"한국인들과 세계인들 사이의 다리가 되고 싶었다. 단순히 국내 외국인이나 영어권 사람들뿐 아니라, 세계 열방을 마음에 품고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 사역하고 싶다.
지난 몇 개월간 심방을 많이 다녔는데, 국내 외국인들은 '마치 투명 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이 가장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한국에 5-10년 있어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함께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 저희 교회에는 한국어가 편한 이들도 있고, 영어가 편한 이들도 있다. 교회부터 이런 구성원들이 공존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만들고 싶다.
현재 핵심 멤버는 15명, 성도는 30여 명, 함께 예배드리는 이들은 평균 60여 명 정도다. 4개월 정도 됐는데, 매주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예배가 좀 정착될 때까지 자리를 채워주시는 사랑의교회 성도님들도 10여 분 계신다.
살면서 어려운 질문에 맞닥뜨릴 때가 있지 않는가.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 모른 채, 방황하는 영혼들이 너무 많다고 느꼈다. 어떤 질문이라도 편하게 할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공동체가 되고 싶었다. 오늘 인터뷰에 응한 것도 그런 이유다."
▲오기원 목사는 "청소년 시절 멕시코 단기선교를 갔을 때, 현지인들에게 놀림을 당해 또래들과 다툰 적이 있었다"며 "그때 '네 손은 나를 위해서만 쓰임받을 것'이라는 하나님 음성을 들었다"고 전했다. ⓒ이대웅 기자 |
-인터뷰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견해가 다를 수 있지만, 소통 없이 각자 따로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적어도 한 곳에 모여서 대화할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소통 없이 각자 달리다 보면 원수가 될 뿐이다. 적어도 서로 존중하는 문화가 자리잡히길 바란다."
-그러나 '탄생예배'만 해도 신문 1면에 광고를 게재하고 김장환 목사가 설교하는 등 "과하다"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탄생예배 주제가 '기성 세대들을 공경하면서 다음 세대를 부흥시킨다'는 것이었다. 김장환 목사님은 제 할아버지 같은 분이시다. 어릴 적부터 많이 사랑해 주셨다. 사람들의 시선을 떠나, 제게 중요했던 분들을 기리고 싶었다. (김장환 목사와 함께 온) 홍잠언 군 특송은 저희도 예배 30분 전에야 알았다(웃음).
아버지(오정현 목사)의 축사도 원래 예정에 없었다. 분명 말이 나오겠지만, 어쨌거나 저희 아버지이시고 신앙의 선배들을 기리는 자리라면 아버지께 말씀을 부탁드리는 것이 제게는 당연했다.
신문에 광고한 것도 이곳에서 누군가의 조언을 받아들인 것이고, 원래 교회를 시작할 때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았다. 광고비는 사랑의교회가 아닌 저희 교회에서 부담했다."
▲뉴서울교회 주일예배 모습. |
큰 교회에선 즉각적 순종 어려워
세습? 한국교회 담임 생각 안 해
아버지는 꿈꾸는 사람인 게 강점
-(아버지가 속한) 합동 교단이 아니라, 백석 교단으로 들어갈 예정이라던데.
"하나님 주신 음성과 사명을 독립적으로 실천하고 싶었다. 아버지 밑에 있으면 오히려 독립적으로 사역하기 어렵다(웃음).
저희 사역 모토가 '즉각적인 순종'인데, 큰 교회에서는 아무래도 쉽지 않다. 여기서 사무실 세팅까지 집에 있는 것들 다 가져와서 혼자 다 했다. 저도 특이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예배 장소도 미국이었으면 직접 알아봤겠지만 한국은 잘 몰라서, 도와 주시는 분들이 서울 쪽을 다 알아보다가 여기로 정했다."
-나중에 뉴서울교회와 사랑의교회가 합칠 거라거나, 오기원 목사가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의 뒤를 잇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지금 이렇게 한국어로 말하고 있는 것도 성령님이 도와주셔서 가능한 것이다(웃음). 한국말이 너무 부족해서, 저는 한국교회 담임을 한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그렇게 할 거면 처음부터 같이 하지, 굳이 이렇게 헷갈리게 시작할 이유가 있을까.
이런 질문들도 좋다. 정직하게 소통하고 싶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항상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정말 제 마음을 나누고 싶었고, 저와 마음이 맞는 분들과는 누구든 함께 사역하고픈 마음이 있다.
▲뉴서울교회 주일예배 모습. |
이번 탄생예배 때도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많이 줬다. 대형교회에서는 이렇게 할 수 없다. 기회가 필요한 다음 세대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저희 모토 중 하나다. 저희 핵심 멤버들 간에는 위계질서보다 수평적인 관계를 추구한다.
미국은 사역에 있어 관계적인 부분은 좋지만 파워가 약하다. 함께 뜨겁게 기도하고 찬양하고는, 밖에 나가서 그대로 담배 피고 똑같이 산다(웃음). 대신 한국은 파워가 있지만 관계적인 부분이 다소 약하다. 이 둘을 잘 조화시켜서 파워도 있고 관계적인 부분도 잘해나가고 싶은 비전이 있다. 미국에서 부흥하는 교회들도 이 두 가지가 함께 있는 교회다."
-아버지의 목회를 어떻게 생각하나.
"아버지와 대화는 많이 했지만, 같이 사역한 적은 없다. 아버지께서 한국에 오신 다음 제가 전도사가 됐다. 제가 한국에 올 때마다 함께 예배드린 정도다.
아버지의 강점은 '꿈꾸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시선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다. 아버지도 힘든 시절이 있었다. 남가주에서 교회를 건축할 때 재정을 다 헌신하셔서, 농구를 하고 싶어도 신을 신발이 없을 정도였다.
저도 태어난 순간부터 PK로서 받는 압박이 있었고, 그래서 PK와 MK에 대한 마음이 크다. 이들은 정말 좋거나 정말 나쁘거나 둘 중 하나다. 중간이 잘 없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목회하고 있는 자체가 아버지께서 좋은 분이셨음을 반증하는 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