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은 한국 문단을 대표할 만한 작가입니다.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광주일고와 서울대를 졸업한 수재로 부모를 포함한 온 집안은 법관이 되기를 바랐지만 그는 평생 작가로 살았습니다. 이청준 문학을 한마디로 정리하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그만큼 다양한 시도와 노력들이 있었고 그의 시도와 노력을 뒷받침할만한 탁월한 재능도 있었습니다. '당신들의 천국'으로 대표되는 인간과 사회 및 개인과 권력 문제에 대한 성찰, 억압과 고통의 시대의 지식인들의 고뇌를 그린 '씌어지지 않은 자서전', 판소리로 대표된 예술 혼을 나타낸 '남도사람' 연작과 '선학동 나그네' '서편제', 종교적인 차원의 죄와 구원의 문제를 탐구한 '낮은 데로 임하소서' '자유의 문' 등에 이르기까지 그의 문학적 스펙트럼은 아주 다채롭습니다.
이청준 작품들 중에 많은 작품이 영화화되었습니다. 영화화된 이청준의 작품들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김수용 감독이 영화화한 '시발점'(1969)의 원작 '병신과 머저리' 두 젊은 남녀의 애절한 사연을 다룬 원작 동명 영화 '석화촌'(정진우 감독, 1972), 또 노모의 장례식을 계기로 그동안 쌓였던 갈등을 풀고 화해에 이르는 가족 구성원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축제'(임권택, 1996), 김기영 감독이 1974년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이어도'(1977), 이청준의 단편 《조만득 씨》를 각색한 '나는 행복합니다' 등등이 있고 인구에 회자되는 서편제와 낮은 데로 임하소서 도 영화화된 이청준의 소설입니다. 그만큼 이청준은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들을 많이 남긴 것입니다.
이청준은 한국 소설계에서 흔치 않은 기독교 문학가입니다. 이청준은 작품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구원을 둘러싼 문제에 대해 진지하고도 치열한 탐색을 계속합니다. 작가 이청준은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을 갈망하고 구원의 원리를 수용하지만 전통적인 기독교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즉 그는 내재된 맹목적 순종과 일방통행적인 구원의 방법론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작가 이청준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종교는 신과 인간이 종속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억압적인 종교가 아닌 수평적으로 '열려 있는 종교'입니다. 이청준 소설에 나타난 종교는 신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가는 '현재 진행형 종교'입니다. 이청준이 자신의 작품에서 그려가는 종교의 진리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창조의 대상입니다. 물론 이점이 전통적 기독교 신앙과의 이청준의 신앙관이 갈등관계를 형성케 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청준은 기독교 신앙과 신앙인의 삶을 섬세하게 다룬 다수의 소설 작품을 남겼습니다. 맹인 안요한 목사의 삶을 그린 '낮은 데로 임하소서', 개발 공화국 문화 속에서의 갈등과 비 성경적인 신자들의 삶의 모순을 그린 '당신들의 천국'이 있고, 얼마 전 기독교 비하 논란과 함께 숱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영화 <밀양>의 바탕이 된 소설 '벌레이야기'등입니다.
소설가 이청준은 인간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인간의 약함과 악함을 고발하는 작품을 남기려는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이런 노력의 일환이 우화 소설입니다.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당신들의 천국'도 일종의 우화 소설입니다. 이청준의 대표적인 우화 소설은 '치질과 자존심' 그리고 '미친 사과' 있고 이청준의 꽁트집 "사랑의 목걸이'에 등장하는 열다섯 개의 단편들이 모두 우화 소설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어느 마을에서 산비탈을 개간해서 배나무를 심었습니다. 배를 많이 수확해서 가난에서도 벗어나고 자신들도 배를 맘껏 먹기 위해서 마을 사람들은 열심히 배나무를 심고 가꾸었습니다. 배나무를 심을 때는 희망을 심었고 거름을 주고 가뭄에 물을 줄 때는 희망을 가꾸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라는 배나무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전심으로 배나무를 가꾸었습니다.
그런데 몇 해 뒤 그 나무들에 열린 것은 배가 아니라 사과였습니다. 애초에 묘목을 잘못 골라서 심었던 것이었습니다. 배나무를 심었다고 믿었고, 배나무를 재배했건만 나온 것은 사과나무였습니다. 배나무에 대한 많은 기대를 가졌던 마을 사람들은 실망이 너무 컸습니다. 너무 실망이 커서 그 현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사과라고 부지지 않고 배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마을에 이미 사과나무가 있었고 그 나무에서 사과가 열리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사과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그들은 그것도 배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들에게는 두 종류의 배나무가 있었지만 사과나무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배를 팔러 시장에 나갈 때마다 다른 동네 사람들이 사과를 배라고 부르는 그들을 놀리고 비웃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그 마을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조롱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기대한 배가 아니라 사과를 맺은 그 미친 나무에 대한 배신감과 수모감이 극에 달하자 마침내 그들은 일제히 산비탈로 달려가서 그 나무들을 모두 뽑아 버렸습니다.
소설 '미친 사과'는 인간의 악함을 고발한 작품입니다. 특히 집단의 악함을 고발합니다. 인간 개인도 약하지만 집단이 목적이나 욕심에 경사되면 그 집단의 악함은 개인의 악함보다 더 악합니다. 개인적 이기심도 문제지만 집단의 이기심은 더 치명적입니다. 자신의 실수나 허물을 인정하지 못하는 개인도 찌질 하지만 집단이 범한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을 때는 좀 더 심각한 비극이 야기됨을 보여 주는 작품입니다.
필자는 담임 목회자의 세습을 감행한 대형 교회가 '우리는 정당하다'라고 강변하는 목소리들을 들으며 '미친 사과'를 생각했습니다. 충성스러운 성도를 목사와 다른 의견을 가졌다고 무참하게 쫓아내는 교회를 보면서도 미친 사과를 생각했습니다. 미친 사과는 집단 바보 현상을 고발합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시인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나의 잘못을 감추려 하고 합리화하려는 노력이 미친 사과를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도 힘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그럴듯한 모습으로 치장하기 위해서 미친 사과를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내 삶의 언저리에 미친 사과가 없는가? 돌아보아야 할 지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