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자연과학에 대한 기독교의 미숙한 대응의 역사
자연과학에 대해 교회 공동체는 늘 미숙한 대응으로 일관해 온 감이 없지 않다. 모두 해석의 문제였다.
천동설과 지동설 문제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그리고 케플러와 같은 성경을 믿는 과학자들이 생각했던 우주관은 당대 제도권 교회의 우주관과 충돌한다. 그리고 결국 구도자 브루노(1548-1600)의 순교로 이어졌다. 코페르니쿠스가 교황청에 자신이 발견한 지동설을 직설적으로 보고하지 않고 모호한 서신으로 "우회(迂廻)"한 것이나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교회와 정치적으로 긴장한 요인 가운데는 분명 지동설의 문제도 주 된 이슈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이 논쟁의 과학적 판정승은 당연히 과학의 편에선 사람들이었다.
과학 기술에 대한 오해
1839년 스코틀랜드의 커크패트릭 맥밀런(Kirkpatrick Macmillan, 1812~1878)이 페달을 장착한 자전거를 발명하였을 때 교회는 이 기묘한 기구를 타는 것을 금지하였다. 당시 성직자들이 오늘날 목회자들이 온갖 자가용을 타는 것이나 자동차 사고로 해마다 세계적으로 수십만 명이 다치고 사망하는 것을 안다면 무어라 했을까.
물과 "생수" 유비에 대한 문자적 성서 해석
물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지구촌 생명체들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 물질이다. 이 광활한 우주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관심은 생명의 고향이요 유일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관심의 천체인 지구에만 오직 "생수"를 주셨다는 것이 성서주의자들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지구와 동일한 형태의 물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물(H₂O)이 지구 외에도 위성인 달, 행성인 수성, 화성 등과 목성과 토성의 위성들에서 존재한다는 것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일부 근본주의자들은 여전히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집착하여 물의 지구 밖 존재를 부정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금성의 구름에서도 놀랍게도 액체 상태의 물이 발견되고 있다. 지구 밖 물의 존재가 밝혀지자 이번에는 발견된 것들은 액체가 아니라 고체 상태의 물(얼음)이지 않느냐며 변명하는 것이 우리 사람이다. 지구형 행성들이 속속 발견되면서 이제는 지구보다 물이 풍부한 행성의 존재까지 알려지고 있다.
물리적 지구 중심의 사고
행성 시스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물을 지구에만 존재하는 유일한 생명 관련 물질로 보는 신학처럼 우주에 수많은(1천억 개 내외) 갤럭시 가운데 태양계 시스템은 오직 은하계(milky way) 갤럭시(1천억 개 내외의 항성) 가운데서도 오직 태양계에만 행성 시스템이 있지 않을까하는 집착이 있었다.
이 근본주의적 주장도 우주 물리학이 등장하고 지구 밖에도 행성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소멸되어 버린 해석법이라 할 수 있다. 노벨상 위원회는 2019년, 1990년 대 중반 태양계 밖에도 행성 시스템이 있음을 발견한 천체물리학자들에게 노벨상을 수여하여 지구 밖 행성 시스템에 대하여 공인하였다. 바로 스위스 제네바대학교의 천문학자인 미셸 마요르(Michel Mayor,77)와 그 제자 디디에 쿠엘로(Didier Queloz,53)교수였다. 이 둘은 우주 초기 상태(빅뱅 이후 초기)를 연구한 미 프린스턴 대의 이론물리학자 제임스 피블즈(James Peebles, 84)교수와 함께 2019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태양계만이 유일한 행성 시스템을 가진 시스템이라는 소박한 생각은 그 수명이 100년도 지속하지 못한 해석법이 되었다. 하지만 과학적 결과를 무시해버리면서 여전히 태양계 시스템만을 신성(?)하게 여기는 문자성서주의자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지구형 행성들의 지속적 발견
지구 밖 지구형 행성(일명 "슈퍼 지구")의 대발견도 놀랍다. 지구형 행성의 존재 가능성은 지난 1990년대 중반부터 관측을 통해 조심스럽게 그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미 항공우주국(NASA)은 드디어 지난 2011년 공식적으로 생명체가 존재하기에 적합한 물이 있고 적절한 온도를 지닌 행성을 발견했다고 처음으로 밝혔다. 외계에서도 지구와 유사한 형태의 생명체가 살려면 가장 먼저 물과 적절한 온도와 암석과 그에 따른 풍화된 흙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NASA는 케플러 우주망원경을 통해 지구형 행성을 발견했다. 케플러-22b(Kepler-22b)라고 명명한 지구형 행성은 태양계의 태양과 같은 기준별로부터 너무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아 액체 상태의 물이 존재할 수 있는 '생명체 거주가능영역(havitable Zone)', 일명 '골디락스(goldilocks)' 영역에 존재하고 있어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알려졌다. '골디락스 영역'이란 영국 전래동화 '골디락스와 세마리의 곰'에서 유래된 단어로 주인공 소녀 골디락스가 곰들이 끓여놓은 죽들 중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의 죽을 맛나게 먹은 데서 비롯된 말이다.
이제 지구가 창조주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물리적 중심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과학적 정설로 수용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 부분은 과학이 다룰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창조주 하나님의 관심이라는 부분을 물리적 언어로 치환할 수는 없음)인 반면, 신학의 기독론과 구원론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여전히 고전 신학과 과학 사이에 고뇌의 이슈로 남아 있다.
바른 성경 해석의 중요성
필자는 이 모든 딜레마에 있어 계시인 성경이 과학적 사실 앞에 밀렸다고 보지 않는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한 일부 교회주의자들과 과학의 본질과 의미와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일부 신학자들과 근본주의과학자들이 밀렸을 뿐이다. 즉 바른 해석의 문제였다.
4. 챗GPT 시대, 설교와 목회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신학은 가끔 예언자적인 예측의 짐을 져야 할 때가 있다. 챗GPT가 대화형 인터페이스를 통해 쌍방 소통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컴퓨터가 처음 등장했던 시절 일부 고민하고 당황한 점도 있었으나 결국은 목회와 설교 준비에 활용하게 되었던 것처럼 목회자들은 AI라는 이 도구도 자연스럽게 활용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챗GPT류의 대화형 로봇들은 목회와 설교 환경뿐 아니라 상상도 못할 세상의 놀랍고도 급격한 변화를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
이를테면 신앙의 유무를 떠나 이제 사람들은 참 된 종교가 어떤 종교인지도 AI에 질문할 뿐 아니라 신의 존재도, 삼위일체의 판단도, 기도문도, 목회와 설교의 가치 판단도 AI에 자연스럽게 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이비 기독교 정보도 더욱 범람하게 될지도 모른다. 악마의 선전선동술은 컴퓨터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유혹할 것이다. 결국 AI로 손쉽게 설교문을 작성하고 목회 계획도 AI의 손을 빌리려던 일부 목회자들은 크게 당황하게 될지도 모른다. 신자들은 목회자의 설교의 표절 여부나 목회에 대한 가치 판단까지 AI에게 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AI는 갈수록 정교한 모범답안(진리 답안이 아님)만을 제공해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가 과거 자연과학 영역에 대한 대응에 있어 늘 미숙한 대응을 해왔다는 교훈을 다시 한번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경솔하게 AI에 의지한 목회나 설교에 익숙해지다가는 목회자 못지않게 AI를 수시로 활용하는 신자들에게 금새 목회자의 신앙과 신학의 내공이 들통나버리는 난감한 상황이 일어날 수 있기에 목회자들은 더욱 말씀과 기도에 충실하고 참 된 주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릴 수 있다. 설교와 목회에 있어 AI정보의 딜레마요 패러독스요 반전인 셈이다.
AI가 세상의 변혁을 가져올 것은 분명하나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과장된 측면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본질적 변화는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은 저마다 AI의 기능을 활용하려 들 것이고 누군가는 AI의 경제적 가치를 극대화하기를 시도할 것이나 이것이 인간 본성의 변화를 초래하지는 않는다. 경제의 양극화와 쏠림 현상은 더욱 심화될 수도 있고 인간은 여전히 죄성을 가지며 유한함에 외로워하고 슬퍼하며 영원한 것을 희구할 것이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늘 과학에 밀려 어리석은 대응을 해 온 기독교 역사를 늘 반추할 뿐 아니라 AI시대를 어떻게 맞을 것인지 기도하고 연구하며 준비해야 한다. AI는 이렇게 목회자들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AI에 능수능란한 신자들보다 더욱 다방면에 탁월하고 철저한 참 된 주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서를 내밀고 있다.
설교자들은 디지털 시대에 세뇌되어 과학을 마치 절대선, 절대군주처럼 여기며 설교하는 누(累)를 범하지 않도록 늘 조심할 필요가 있다. 내재(內在)적 도구에 불과한 자연과학으로 초월의 창조주를 설명할 수 있다는 과욕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과학에 묶인 설교보다 과학을 초월한 전능자의 메시지를 듣고 싶어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5. 자연과학에 대한 종교개혁가들의 이해, AI시대의 목회와 설교에도 타당할까(Deus Semper Maior-모든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
당연히 그렇다.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역사, 모든 민족, 남녀노소, 빈부귀천, 지식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만물의 하나님이다. 성령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상관없이 역사를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 진리를 계시하여 왔다. 또한 신학도 늘 종교 개혁 시대 하나님의 사람들의 해석이 탁월한 성령의 지혜임을 논증하여 왔다. 종교개혁시대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떻게 성경을 해석했으며, 그것은 오늘날 AI시대에도 여전히 적용될 수 있을까? 이 부분을 살펴보려 한다.
1) 창조와 피조 세계를 결코 혼동하지 말라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기독교는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계시의 종교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과 물질의 창조주요 인공지능을 만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유한한 피조물인 것이다. 이 같은 텍스트(Text)와 컨텍스트(Context), 본질과 비본질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AI는 결코 시간과 공간과 물질의 한 톨도 만들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고안한 장치일 뿐이다.
2) 악마는 디테일 속에 있다?
AI의 디테일한 속성은 다시금 시한부 종말론자들과 같은 바른 신학을 이탈한 세력들의 활동 영역을 넓혀주어 교회 분열을 자극하는 수단과 도구가 될 가능성이 있다. 계시록 13장의 666을 컴퓨터, 바코드, 신용카드, 스마트폰, 베리칩 등 과학기술에 잘못 적용하여 기독교를 우스꽝스러운 종교로 만든 일부 기독인들은 AI에 대해 또 얼마나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될까? 목회자들은 이 시한부종말론의 파고가 AI시대 또다시 시작될 것임을 인식하고 준비하고 선지자적 성경의 바른 진리를 명료하게 선포해야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