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족기독교백년사 - 제2편 한국교회의 형성과 부흥1.

제1장 개국과 미국선교사들의 내한

1.의료.교육사업의 전개
쇄국정책으로 나라의 문을 닫고 오랫동안 서양인의 입국을 금하였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의 기독교 전파의 시기는 자연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호 개방의 시기는 드디어 도래하였다. 1882년 5월 22일 미국과의 수호조약의 체결을 비롯하여 그 이래로 영국 프랑스 등 여러 나라와도 교제의 길을 텄다. 미국의 교회가 가장 먼저 한국 선교의 손을 뻗치게 되었다. 그때에 일본에 체재하고 있은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Maclay)목사는 한국을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김옥균을 통하여 고종황제를 알현하였으며, 이나라의 개화를 위하여 서양 과학과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고종은 드디어 "한국 내에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개시해도 좋다."고 하는 윤허를 내렸다. 기쁘메 넘친 매클레이 목사는 곧 본국 선교본부에 이 소식을 알리면서 한시 바삐 의사나 교사를 보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한편, 중국에 와 있던 미국 선교사들도, 즉 산뚱성에 와 있은 장로교 선교사 레이드(Gilbon Reid) 목사는 선교 본부에 한국 선교를 위한 계획을 제시하여 선교 개시를 촉구하였다. 1884년 9월 20일 알렌(Horace Newton Allen,안동)이 제물포에 상륙하였다. 그는 한국을 찾기에 앞서 중국 상하이에서 의료 선교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국 선교를 위한 인물을 물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하였다. 한국의 사정이란 아직까지 선교사라는 신분을 밝힐 수 없었다. 때문에 그는 미국 영사관의 공의라는 명목으로 입국하였고 동시에 영국과 청국,일본영사관의 공의의 직분까지 맡아 보았다. 그의 입국은 의사가 긴급히 요구되고 있는 외교관들 사이에서 대호평이었다. 그러나 그의 본래의 사명은 선교사업인데,의사로사만 일해야 하니 답답하고 불만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던 중에 돌발적인 사건이 터져 선교사업 수행을 위한 호기회가 도래하였다.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왕족 중의 한 사람인 민영익이가 우체국 낙성식에 참석하였다가 쿠데타를 일으킨 개화당 자객의 칼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 장안에서 유명하다는 한의들을 14명이나 불러들여 치료하였으나 효력이 없었다. 알렌 의사는 그를 정성껏 치료하였으며 생명을 구하는데 성공하였다. 결과에 대한 보상은 과연 놀라왔다. 그는 궁중의 시의가 되는 극진한 대우를 받았으며 서양 의술의 탁월함이 인정되어 병원을 개설해도 좋다는 윤허를 받았다. 알렌 의사는 곧 현대식 병원을 세웠으며 광혜원(Wide spread Relief Hous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중신들이나 함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병을 그리스도의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시료하였으므로 환자는 날로 늘어났다. 그가 한국인들로 부터 얻은 신임은 곧 선교사업을 전개하는데 필요한 전초 기지 구축에 성과를 올렸다. 그야말로 알렌이 개척한 그 길을 밟고 언더우드나 아펜셀라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일하게 되는데 어려움을 덜어 주었다.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병행하여 시행하였다. 서양의술에 대한 신망은 날로 깊어갔고 동시에 서양교육에 대한 원망도 점점 높아갔다. 한국 정부의 노력도 현대식 교육을 도입하려고 애쓴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특히 고종의 관심은 지대하였으며 일본을 비롯하여 중국과 미국 등 지에 몇 차례의 시찰단을 파송하여 또는 유학생을 보내어 세계의 정세를 연구 시찰케 하는데 열심을 기울였다. 1883년 6월,미국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민영익은 곧 고종에게 현대식 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주달하였다. 그러했기에 그 해 7월에 서울을 방문한 매클레이 목사에게 그렇게 쉽게 교육사업의 윤허를 내리셨던 것이다. 한국에서의 최초의 현대식 교육기관은 몰렌돌프(P.G.Von Mollendorf)에 의하여 시작된 영어 강습소인 것 같다. 외교통역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영국인 해리팩스(T.E. Hallifax)와 중국인 교사가 교수하였다. 그후, 한국정부로부터 현대식 교육의 지도자를 파송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미국정부의 문교부장관 이튼(John Eaten)은 헐버트(H.B.Hulbert)와 벙커(D.A.Bunker)와 길모아(Gearge W.Gilmore)의 세 사람을 보냈다. 이들을 중심하여 1884년 7월 4일에 육영공원이 설립되었다. 이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학교로서 여기에서는 정부에서 일할 관리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필요한 학교가 정쟁의 틈바구니에서 해어날 길이 없어 10년을 더 계속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이에 선교사들은 직접 학교를 세우고 교육사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기독교 복음을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교육사업에 착수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면서도 건실하고 대중적인 현대 교육을 소개하였으므로 한국민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와 열렬한 환영을 받게된 것이다. 정부가 다하지 못한 교육사업의 효과를 선교사가 수행하여 올리게 되었음은 한국 민족의 개화 계몽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유익하였다.

2. 선교의 활동과 조직교회의 출현

1885년 4월 5일,부활절 아침에 미국 장로회의 파송을 받은 언더우드(Horace G.Underwood,)선교사가 인천에 상륙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처음 얼마동안 목사라는 신분을 밝히지 못하고 알렌이 세운 광혜원의 강사로 일하였다. 그는 한국어를 배워서 말을 좀 할 수 있게 되자, 길가에 나가 노방전도에 열을 올렸다.
바로 이러한 때에 황해도 장연의 솔내에서 전도를 시작했던 서상륜이 서울로 언더우드 목사를 찾아와 솔내교회를 한번 방문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얼마후 그곳을 방문한 언더우드 목사는 벅차게 소용돌이치는 감격을 누를 길이 없어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서 국법에서 금하는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자기네들 스스로의 힘으로 교회를 세웠고 또 그들 자신이 교히를 운영해 나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언더우드 목사는 한국인을 향하는 뜨거운 애정이 저절로 솟아오름을 금하지 못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1887년 가을에 솔내에서 7명의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서울에 돌아온 그는 서울에도 교회를 세워야 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었다. 1887년 9월 27일에 언더우드 목사는 새문안의 자기 사랑방에 14명의 신자를 모아 놓고 예배를 드린 후 정식으로 교회의 설립을 공포하였다. 이것이 오늘의 새문안교회의 창립이다. 이 역사적인 한국교회 최초의 교회가 조직되던 날,새문안교회 창설예배에 한국교회 최초의 전도자인 백홍준과 서상륜,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인 알렌과 언더우드 그리고 한국인에게 최초로 복음을 전달한 로쓰 목사등, 이렇게 거대한 인물들이 한자리에 앉았다. 이는 장차 한국 장로교회가 그 거보를 내딛고 됨을 축복하고 있는 듯 빛나는 영광의 모습이었다. 감리교인 아펜셀라 선교사는 교인들을 위한 예배 처소로 정동에 있는 집 한채를 구입하였으며 1887년 10월 9일에 정식으로 예배를 올렸다. 이 날에 교히 관리책임자의 아내 김씨(Pauline Kim)의 조모가 세례를 받았다. 이것이 오늘의 정동제일교회의 출발이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라의 두 목사는 한국에 처음 들어와 기독교 복음을 직접 전하면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열심하는가 하면 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을 한느데도 남다른 정열을 기울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들은 기독교 진리에 입각한 새 과학 문명을 한국인들에게 교육하며 또 새로운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언더우드는 경신학교를 세웠고 아펜셀라는 배재학교를 시작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또 아펜셀라 목사와 협력하여 대학을 세우는 일에 성공하였다. 연세대학교는 바로 그들이 설립한 것이다. 한편 감리교 선교사인 스크랜톤(Scranton)부인은 여성 교육을 위하여 이화학당을 개설하였는데 이것이 오늘의 이화여자대학교로 아시아 굴지의 대학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위에서 소개한 두 분 최초 선교사인 뒤를 이어 내한한 선교사는 호주 장로회 소속인 헨리 데이비스(J.Henry Davis) 목사였다. 그는 남한 지방을 여행하면서 전도하였는데 1890년 4월 15일 아깝게도 과로한 나머지 급성 폐염에 걸려 부산에서 객사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호주 선교사들이 여럿이 도래하였다. 1892년에는 미국 남장로회에서 파송한 레이놀즈(W.D.Reinold,)를 비롯한 6명의 선교사가 함께 입국하여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선교하였다. 1895년에는 미국 남감리교에서 보낸 레이드(C.E.Reid)목사가 들어와 경기도 송도를 중심하여 선교사였다.카나다 장로회에서는 1893년에 맥켄지(William John McKenzie)를 한국에 파송하여 선교사업에 착수케 하였다. 불행하게도 그는 솔내 지방에서 전도하다가 열병으로 별세하였다. 이 소식이 본국에 전해지자 교회는 뒤를 이어 5명의 선교사를 더 보내어 복음을 전파하게 하였다. 캐나다 장로회는 주로 함경도 지방을 중심하여 전도하였다. 1907년에는 성결교회 계통인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에 카우만(C.E.Cowman)과 길보른(E.A.Gilborne)이 한국을 찾아왔고 그 이듬해에는 영국 구세군(The Salvation Army)의 선교사들이 들어왔다. 이처럼 한국교회 초창기에 각 교파의 여러 선교사들이 들어왔으나 모두 함께 고생하면서 각자가 맡은 선교구역에서 최선을 다해 전도한 결과, 오늘의 이 땅에 수많은 교회를 이룩하는데 성공하였다.

3.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수립

한국이라는 토양에 기독교 복음을 부식하는데 있어서 그 선교정책을 바로 설정하는 일이란 매우 중대한 과업임에 틀리없었다. 한국을 찾은 선교사들 중의 대부분은 보수적 신학 사상과 독실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어서 그리스도의 희생 봉사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면서 십자가의 도를 전하였기이 때문에, 수천년래 한국민의 마음 속에 뿌리박혀 잇던 샤마니즘(Sharmanism)의 무지와 또는 유교의 형식주의,불교의 미망을 타파하는데 상당한 성과를 올렷음은 좋은 평가를 받을만 하다. 한국 주재 선교사 일동은 1890년 6월 말,중국에서 다년간 선교에 종사한 네비우스(John L.Nevius)목사를 초청하여 세미나를 열었다. 그 결과 한국 선교사업을 위한 기본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였다.
첫째로, 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였으면 끝까지 떠나지 말고 붙들어 그가 개인전도하는 일군이 될 때까지, 자기의 직업에 종사하면서,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게 되기까지 끈질기게 지도해야 한다.

둘째로, 교회의 운영과 기구 조직은 그 교회 자체가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기획 실천하여 발전시키도록 한다.

셋째로, 교회에서 전도사업을 감당할만한 인물이 나오거나 재정을 공급할 수 있는 유자격자가 생기면 그들을 선임하여 교회의 지도 일군으로 세운다.

넷째로, 교회당 건축은 그 교인들 자신의 힘으로 하게 하되 건축의 구조나 모양은 한국 고유의 모습으로 지방의 교회당답게 한다. 교회사가인 마삼락(Samuel H.Moffett)은 여기에 두가지를 보충하여 설명하였다. 즉 성경연구반을 조직하여 성경 지식을 신도들에게 보급시키도록 할 것과 외국 선교사들에게는 개체교회의 담임을 삼가도록 한 내용이었다.

위가 일반적으로 네비우스 선교 방안이라고 불려지는 것이며 이를 대별할 때 자력 전도,자치 제도,자급 운영의 셋으로 요약하게 된다. 그 중심 이념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피 선교지로서의 의타심이나 경제적 무능력을 배제케 하여 '자립하는 교회'로서의 토착화하는 기초를 닦게하려는데 목표가 있었다. 초기 한국교회 특히 장로회는 이 방안을 채택하므로 그 이후의 선교 정책에 직접적이고 깊은 영향을 미치게 하였으며 한국교회 성장을 위해 상당한 공헌을 남겼다.

1893년에 조직을 본 장로회에선교사공회는 이 네비우스 방안을 참고로 하여 보다 더 핵심적인 몇가지 내용을 첨가 확대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상류 계층보다 서민층 전도를 우선한다.
(2) 부녀자 전도와 여성을 위한 교육에 주력한다.
(3) 지방에 초등 교육기관을 널리 설립한다.
(4) 교역자 양성에 특별 유의한다.
(5) 성경 번역의 진행과 보급에 노력한다.
(6) 모든 기독교 문서에 한글을 사용한다.
(7) 선교사가 돕는 교역자 수를 줄이고 자급하는 교회로 육성한다.
(8) 한국인 스스로 동족에게 전도하는 자립 전도의 훈련을 강화한다.
(9) 의료 선교사는 시료와 복음 전도를 병행한다.
(10) 퇴원 환자의 집을 방문 전도한다.
이 선교 정책은 당시 한국교회 발전을 위하여 매우 창조적이었고 고무적인 전도 방안으로서 교회,학교,병원의 세 면을 통한 입체적인 선교 형태를 갖추어 한국 교회사상 기여를 크게 남겼다.

[출처:parklanda.tistor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