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서 가장 고약하게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패거리를 짓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나는 바울 파다, 아볼로 파다, 게바 파다, 라는 짓거리(?)를 하지 말라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분파의 이야기가 아니고, 패거리 짓이라는 것은 사람 밑에 들어가는 인생을 살게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큰 사람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지. 사람 밑에 들어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라도 사람 밑에 들어가거나, 인간적 가치 밑에 들어가거나, 잘못된 흐름의 밑에 들어가게 된다면 비참하게 작아집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내가 그보다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종 교회 안에서 끼리끼리 패거리 짓을 하거나, 사상으로 끌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무엇보다 크신 분이시기 때문에, 패거리나 이데올로기 밑에 들어가게 되면 작아지고 왜소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교회를 초라하게 만드는 비참한 짓이라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 안에 신앙의 위대함이 사라졌습니다. 신앙의 큰 산이요, 신앙의 큰 숲이 사라짐으로, 진정한 신앙 생태계가 무너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한때 교회 안에는 힘들고 지친 사람들이 새 힘 얻고 회복되는 숲이 있었습니다. 낙심한 사역자, 상처 입은 신앙인들이 조용히 회복할 수 있는 신앙 생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치고 상한 사람들이, 문제에 눌리고, 상처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말씀과 찬양을 통해 자신의 문제와 상처보다 크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됨으로 세상은 작아지고, 나는 커지는 회복을 경험했습니다.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 만난다고 문제가 다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내가 커지니, 문제가 "점"같이 작아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깨지는 시대를, 내가 무너지는 시대를, 내가 현실을 아는 시대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모순투성입니다. 선이 악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은 공정하지 않았습니다. 죄악 된 일을 반복함으로 심지어는 성도들이라는 사람들까지 배신을 밥 먹듯이 합니다.
믿음이 많이 작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만남이 없이 커질 방법은 없습니다. 신앙의 훈련 없이 훌륭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징계로. 고난으로, 훈련을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 백성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돼지는 목 관절이 없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땅만 바라보고 살지 하늘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뭔가에 걸려 넘어지게 고난 속으로 집어 던지십니다. 결국에 뒤집힌 돼지로 하여금 하늘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로소 우리는 하늘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더 커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은 목 관절이 없으면, 절단을 내서라도 관절 만들어 주십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