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Photo : 기독일보) 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휘튼 대학 빌리그레이엄센터 의장인 에드 스테처(Ed Stetzer)는, 미국을 네 그룹, 즉 "확신 있는 그리스도인," "문화적 그리스도인"(가족이 그리스도인), "회중 그리스도인"(특별한 날에만 교회 출석), "비그리스도인"으로 나눈다. 스테처는 그동안 통계학자들이 문화적 그리스도인과 회중 그리스도인을 포함해서 75%를 그리스도인으로 보지만, 사실은 그들이 세속적인 세계관으로 떨어져 나가고 있다고 본다. 비기독교인 25%에 대해서도 당연히 전도해야 하지만, 중간 지대에 있는 50%를 어떻게 품느냐에 따라 기독교인이 75%가 되기도 하고 25%가 되기도 하니 풀어야 할 과제가 크다.

사람들은 이들 50%를 교회 내 CEO들이라 하는데, 이는 회사 CEO가 아니라 일 년에 두 번, 즉 "성탄절과 부활절에만(Christmas and Easter Only)" 출석하기에 그렇게 부른다. 즉 무늬만 그리스도인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간혹 교회에 가기에 교회 문화는 어느 정도 알지만, 신앙에 대한 확신은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이들이다. 이들 중 한 때는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난 이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어떤 이는 이렇게 고백한다. "저는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지만, 그게 다였어요.ⵈ성경을 읽었으나, 참으로 성경이 나를 읽게 한 적은 없었어요. 그건 단지ⵈ종교에 불과했어요." 솔직한 고백이다.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종교생활을 해 온 것이다.

이들을 교회로 좀 더 들어오게 하는 것은 복음을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이들을 전도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 이미 교회가 어떤 곳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대충은 알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무늬가 아니라 실제로 주님을 고백하도록 그들을 복음의 본질로 인도하는 것이지 싶다. 인격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해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해 주어야 한다. 그 무게 이동은 바른 복음 전도에 있을 것이다.

이들과 다른 차원에서 교회를 떠난 이들이 있다. 바로 가나안 성도들이다. 이들은 교회를 떠나거나 잘 다니지 않는다는 현상적인 면에서만 보면 무늬만 그리스도인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신앙을 가진 이들도 많다. 그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교회에 실망하고 떠난 이들이다. 그들에게는 교회의 변화된 바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리퀴드 교회 담임목사인 팀 루카스 목사는 교회에 여전히 회의적인 이들을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긍휼 어린 행동, 즉 "조건 없는 나눔과 온정"을 주어야 한다. 둘째, 가정을 돕는 일이다. 셋째, 소속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가나안 성도들에게는 교리를 새롭게 가르치거나 좋은 설교를 제공하는 것으로는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우선 교회의 변화된 모습 혹은 행동을 보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동안 교회가 많이 놓친 부분들이다. 이 부분을 강조한다 해서 복음의 본질을 놓치는 것은 아니다. 방법을 달리해 보자는 것이다. 교회가 참다운 공동체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서로의 지친 어깨를 기댈 수 있고 개인 실존의 아픔까지도 공동체 안에서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관계의 공동체가 형성된다면 가나안 성도도 기댈 언덕이 있지 않을까.

물론 교회 안에 있다고 그리스도인이며, 교회 밖에 있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은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양 우리 밖에 있는 양'과 '양 우리 안에 있는 늑대'를 구분한다. "외부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내부에 있고, 내부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외부에 있다." 형용모순이다. 우리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 우리 밖에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 밖에 있어야 하는 것도 우리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 양은 우리 안에 있어야 하기에 '양 우리 안에 있는 양'과 늑대는 우리 밖에 있어야 하기에 '양 우리 밖에 있는 늑대'가 맞는 표현이다. 그런데 양 우리 밖에 양은 있을 수 없는가? 있을 수 있다. 실제로는 형용모순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다만 이 형용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가 고민이다. 어떻게 하면 양 우리 밖에 있는 양을 양 우리 안으로 인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양 우리 안에 있는 늑대를 양으로 바꿀 수 있을까.

이 과제는 안과 밖의 이분법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안에 있는 양이 밖에 있는 양을 품을 수 있을 때 가능성이 있지 싶다. 그럴 경우 안이 세속화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가만히 있을 것이 아니라, 안의 사람이 밖으로 나가 밖에 있지만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안에 있어야 할 사람들을 안으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안의 양은 우리 밖의 양의 '삶과 언어'를 알아야 한다. 필자는 최근 <새롭게 하소서> 방송을 시청하면서 MC 주영훈에게서 이런 접근법을 보고 있다. 그의 언어에는 기독교적 경건이 식상하게 만들어 내는 꾸밈 언어가 없는듯하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교회를 떠난 이들뿐 아니라 심지어 믿지 않는 이들도 이 방송을 시청하고 있다는 댓글을 본 적이 있다. 이것만 하더라도 큰 전도 아닌가.

SNS에서 본 글이다. '피자 박스는 4각형인데, 피자는 원이고, 그것을 잘라놓은 조각은 삼각형이다.' 형식이 내용을 담을 수 있으면 내용과 형식이 굳이 같은 획일적 모양일 필요가 없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성도를 담고 있는 교회가 다양성 내지 유연함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무늬만 그리스도인도, 가나안 성도도 품을 수 있는 그런 넓은 품이 있는 교회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그들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더 수고해야 한다. 새로움은 언제나 0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1에서 시작하는 것이기에 +1의 수고가 따르더라도 그들이 돌아온다면 그 수고는 결코 헛된 수고가 아닐 것이다. 75%냐 25%냐의 차이가 크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