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Photo : 기독일보) 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드라마 <수리남>이 넷플릭스에 방영되었다. 마지막 6화에서 마약 사범 가짜 목사가 궁지에 몰려 죽을 상황에 이르자 총을 겨눈 이들에게 다급하게 몇 번이나 이렇게 말한다. "Don't shoot", "I am pastor." 자신이 목사이니, 나쁜 짓을 하지 않았으며, 그러니 자신을 쏘지 말라는 의미다. 한없이 약하고 한없이 적나라한 우리 인간의 마지막 밑바닥을 보는 듯했다.

이 드라마는 수리남에서 마약왕이 된 한국인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지만, 목사 이야기는 만들어 낸 이야기라 한다. 그런데 요즘 이런 설정이 잦다. 이런 가짜 설정에 기독교인들은 불편함을 느끼지만, 대중들은 그런 모습이 익숙하다는 반응이다. 이것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것이 어쩌면 지금의 기독교가 대중에게 비치는 모습이 아닐까 싶어 씁쓸하다. 우리 스스로 깊이 반성하고 이런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를 바꿀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평가가 밑바닥인 시대에 우리는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팽배한 시대에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을까? 맞서 싸워야 하는가? 아니면 포기해야 하나. 아니다. 그럼에도 겸손히 진실하게 전해야 할 것이다.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는 정확한 주소가 필요하다. 식사하기 위해서는 가고자 하는 식당의 정확한 주소를 알아야지 그 옆집 미장원 주소로 가서 밥을 달라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다. 하나님 나라의 주소가 있다. 그 주소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 주소는 바로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다. 그 정확한 주소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 전해야 한다. 다른 주소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정확한 주소 말이다.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하다.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주의 사자가 사가랴에게 나타나 아들 요한을 얻을 것인데, 그가 큰 자가 되어 모태로부터 성령 충만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할 것이라 한다. 또한 그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지고 주님보다 앞서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식에게 돌아오게 하고, 거역하는 자들을 의인의 지혜의 길로 돌아서게 해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된 백성으로 만들 것이라 한다(눅 1:15-17).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창조주, 구세주, 성화자로 고백한다면, 세상 그 누구도 이 고백을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세례 요한이 한 것처럼, 하나님이 창조하신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전도 아닌가.

복음 전도에 힘을 내자.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기독교의 복음이 틀리지 않았음과 교회가 반이성적인 인간들만 모여 있는 곳이 아님을 세상에 알리자. 그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진리의 하나님이라면, 그 진리를 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값진 일이지 않은가. 거짓을 진리로 알고 한평생 살다가 세상을 떠나면 그보다 더 억울한 일이 어디 있을까. 산다고 사는 것이 아니며, 존재한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와 역사와 존재의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살 때 진정으로 살고 존재하는 것일 거다.

그러기에 돌아오게 하자. 믿지 않은 이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자. 이 일에 반대할 이는 없을 것이다. 다만 방법상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 방법은 서로 토론과 대화로 조정할 수 있다. 목적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이들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누구도 이 사명에서 예외일 수 없다. 신학도 마찬가지다. 신학이 영혼을 살리는데 실제적으로 기여해야 한다. 현학적 사변적 추상적 논쟁만 할 것이 아니라 영혼을 살리는 일에 학문적 뒷받침을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승천하실 날이 다가오자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로 마음을 정하시고 심부름꾼들을 앞서 보내셨다. 그들이 길을 떠나서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 사람의 한 마을에 들어갔다.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이므로 예수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이유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좋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 성지로 가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때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라 하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여쭌다. 우레의 아들들답게 '저들이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불이 저들을 멸하게 할까요' 한다.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하시는가? 사마리아 사람들이 주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해서 불이 내려와 태워버리기를 원하시는가? 아니다. 그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다. 주님은 오히려 야고보, 요한을 꾸짖으신다. 그리고는 다른 마을로 가신다(눅 9:51-56).

믿지 않는 이들을 그것도 거부하는 이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다. 주님을 영접하지 않는다고 그들에게 보복할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 곳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시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다. 우리도 그저 부지런히 전해야 할 것이다.

심지어 예레미야는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사로잡아간 성읍의 평안을 기도해 달라고 요청한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 29:7). 자신을 사로잡아간 곳의 평안을 구한다는 것은 복음을 반대하는 이들에 대해 저주를 퍼붓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어느 방법이 복음을 전하는데 더 급진적인가.

세상이 기독교를 조롱한다고 우리도 같이 조롱하지는 말자. 세상의 평안을 기도하며 묵묵히 복음을 전하자. 내가 믿는 것이 진리임을 삶으로 살아내자. 그러다 보면 세상 사람들의 조롱이 변하여 복음에 귀 기울이지 않겠는가. 그런 날을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