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바이처 박사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분입니다. 지금 40-50대 분들은 어릴 적, 세계위인전집을 통해, 슈바이처 박사의 일대기를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아내와 함께 아프리카 의료 선교에 죽을 때까지 헌신한 분이십니다. 그의 박애주의, 박애정신은 인류 역사에 남을 만큼 큰 획을 그었습니다. 그러나, 한 동안 크리스천들 사이에서는 그가 구원론, 구원에 대한 신학적인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둥, 구제와 선행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둥, 논란도 있었습니다.
슈바이처는 독일계 프랑스인으로서, 아버지가 루터교 목회자였습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신앙교육을 철저히 받고 자랐습니다. 게다가 그는 성품적으로 다른 이에게 선을 베푸는 기질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그가 유년시절에 좋은 옷을 입고 학교가기를 거부한 일은 유명합니다. 아버지가 목회자였지만, 슈바이처의 집안은 조상 때부터 부유한 가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릴 적부터, 고급스런 소재의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를 입학하게 되었는데, 다른 친구들은 자신에 비해 남루한 옷을 입고 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모님께 자신의 친구들과 같은 종류의 옷을 입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슈바이처는 원래 음악가였습니다. 그는 음악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고, 재능에 맞춰 음악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음악에 관한 책을 쓰기도 했는데, 그가 쓴,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바흐에 관해 쓴 책은 당시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탁월한 책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아버지처럼,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을 공부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학공부도 그의 선한 마음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의사가 되기로 결정하고, 의과대학을 졸업하였고, 의학박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로 가서, 의료선교를 하기로 결정합니다. 당시,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이 없던, 파리 선교회에 직접 찾아가서, 설득하고, 후원을 얻어낼 정도로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마침내 선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평생을 바친 선교지는 당시 프랑스령이었던, 아프리카 지역, 람바레네라는 지역이었는데, 현재는 가봉이라 불리는 나라입니다. 처음 그가 병원으로 삼은 곳은 닭을 키우는 닭장이었습니다. 그는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닭장을 개조하여, 의료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때로는 아프리카인들이 고마워하기는 커녕, 이해 못할 반응을 하여, 실망할 때도 있었지만, 그는 아프리카에 뼈를 묻는다는 심정으로 선교하였고, 실제로 아프리카에 뼈를 묻는 삶을 살았습니다.
세계대전으로 다시 본국, 프랑스로 돌아올 수 없는 상황에서도 모금 운동을 하여,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가, 의료선교를 강행하였습니다. 그의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삶은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음악가, 목사, 의사였지만, 철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명언을 남겼습니다. 여기 그가 남긴 섬김과 나눔에 대한 몇 가지 명언을 소개합니다.
"나는 여러분의 운명을 알지는 못하지만, 이 한가지만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 정말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봉사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르 끊임없이 탐구하여 깨달은 사람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동정심이라는 이름의 원을 모든 생명에게로 넓히기 전까지 인간은 진정한 평화를 느낄 수 없다."
"선한 일을 했을 때 느끼는 내적 기쁨은 영혼이 필요로 하는 자양분입니다."
"30살까지는 학문과 예술 속에서 살고, 그 이후부터는 인류에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
"지속적인 친절함으로 많은 것을 이뤄낼 수 있다. 태양이 얼음을 녹이듯이, 친절은 오해, 불신, 적대감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그를 통해 더 부유하고 행복해 질 수 있다."
"성인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천사가 될 필요는 없다."
알베르토 슈바이처, 그는 위인전에서 읽은 것처럼, 정말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누고 베풀고 사랑하는 삶이 우리 안에 다시 회복되기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