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Photo : 기독일보) 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어느 교회 다니세요?' '동네 작은 교회 다녀요.' 큰 교회 출석하시는 성도들은 구체적으로 교회 이름을 언급하지만, 작은 교회 다니시는 분 들 중 많은 이들은 교회 이름 언급하는 것을 상당히 꺼린다. 머뭇머뭇하면서 작은 목소리로 겨우 입을 뗀다. 왜 그럴까? 혹시 우리가 모르는 "동네 작은 교회"라는 교회가 진짜로 있는 건 아닐까. 작은 교회 성도들도 당당히 교회 이름을 밝히면 좋겠다.

매주 월요일 저녁 몇몇 동네 작은 교회 목사님들과 '말씀 나눔과 기도 모임'을 한다. 먼저 만나 식사하고 멤버 중 한 목사님이 사역하는 교회에서 모임을 한다. 함께 일상을 나누고 말씀을 나누고 기도한다. 개척교회 목사님들의 말씀 나눔은 구체적이며 기도는 간절하다. 거의 토해놓는다. 하나님 한 분밖에 도울 분이 없다는 것을 매일매일 체험하니 그럴 것이다.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 주시기를 소망한다.

언젠가 개척교회 목회를 하는 동기 목사를 만난 적이 있었다. 이런저런 목회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말을 잇지 못하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더라. 어른이 되어 다른 사람 앞에서 눈물 흘린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그 눈물을 보니 당황스럽고 안쓰러웠다. 사연을 들어보니, 온 마음 다해 온 정성 다해 교인들을 돌보는데도 그들의 마음이 바뀌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마음이 바뀌기는커녕 어떤 분들은 오히려 상처 되는 말을 한다는 거다. 그러니까 그 마음이 아프고 아프니까 운다.

어느 눈물인들 기쁨의 눈물이 아닌 이상, 힘들지 않은 눈물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목회자의 눈물은 더 힘든 것 같다. 그러니 성도들은 주의 종들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바울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NIV는 '알고'를 'respect/존중하라'로 번역하고 있다)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라'(살전 5:12-13a) 말씀하신다. 성도들이 주의 종들을 존중하고 귀히 여길 때, 그 목사님의 목회와 그 교회가 건강해지지 않겠는가.

필자는 교회 사역을 하지 않지만, 개척교회 목사님들과 비전을 공유한다. 교회를 어떻게 살리는가. 가만히 있으면 되는가. 밥만 같이 먹으면 되는가. 신세 한탄만 하면 되는가. 아니다. 작은 것이라도 함께 비전을 나누어야 한다. 함께 비전을 나누는 데서 함께 비전을 볼 수 있다. 거기서 부흥은 시작할 것이다. '목사님들 교회에 일 년 안에 30명씩 보내 달라고 기도하자' 했다.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하고 계시지만 오로지 목회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자' 했다. 30명만 되면 자립은 할 수 있다고 하니, 그 30명 놓고 기도해야 한다. 그 비전을 목사님들이 성도들과 나누면 한다. 성도들이 자기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그림 그릴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면서 이런 마음을 가진다. "우리의 하나님은 모든 신들보다 크신 분이시므로, 내가 지을 성전도 커야 합니다."(새번역, 대하 2:5). "크다"가 꼭 사이즈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위대하다"를 의미할 수도 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니 내가 지을 성전도 위대해야 합니다.' 위대한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면 하나님의 교회를 위대하게 이루어보자. 그것은 목회자 자신의 존재를 건 목회를 성도들이 보고 참여할 때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 꿈을 가진 목회자가 함께 모여야 한다. 동네 작은 교회들이 홀로 고립되어 고독하게 버틸 것이 아니라 이런 비전을 품고 서로 연합했으면 한다. 서 넷 교회가 모여 연합 행사를 한다면 서로 힘이 되지 않겠는가.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물꼬를 터준 행사가 미주지역에서 있었다. '예배 회복과 선교적 삶으로의 결단'이라는 주제로 열렸던(Sep 26-28, 2022) <위 브릿지 컨퍼런스(We Bridge Conference). 이 컨퍼런스는, 재정적으로 자립한 지역 교회들이 현재 외부의 재정 후원 없이 30명 미만으로 예배드리는 공동체를 2023년 1월부터 3년간 매월 500달러씩 후원한다는 취지로 열렸다. 감사한 것은, 함께 모임을 하는 모든 목사님들이 여기에 선정되었고 또 그 컨퍼런스에 참여하시고 가슴 뛰는 비전도 나누어 주셨다.

이런 운동의 취지와 마음이 소중한 것 같다. 자립한 교회들이, 작은 교회들을 어떻게든 도와야 한다는 취지에 참여했다는 것이, 교회 연합에 중요한 시발점으로 작동할 것이다. 다윗이 암몬과 아람의 연합 군대와 싸울 때 요압과 아비새를 보낸다. 요압은 아람 군대를 맡고, 아비새는 암몬 군대를 맡지만, 서로 협력하며 요압이 아비새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암몬 군대가 너보다 강하면 내가 가서 노를 돕겠다.' 요압이 아람 사람과 싸우러 나가니 그들이 도망간다. 아람 군대가 도망가는 것을 보고 암몬 군대도 도망간다(삼하 10:11-14).

협력 전투의 중요성을 볼 수 있다. 요압과 아비새의 연합은 목숨을 건 연합이지만, 암몬과 아람의 연합은 비즈니스적 연합일 수 있다. 손익계산에 따른 연합은 느슨한 연합이며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 교회가 서로 협력해야 한다. 영적 전투에서 서로 도울 수 있어야 한다. 동네 작은 교회가 요압과 아비새처럼 서로 협력하여, A 교회가 힘들 때 B 교회가 돕고, B 교회가 어려울 때 A 교회가 함께 해야 한다. 그것이 협력이다. 그러기 위해 동네 작은 교회에 일꾼이 있기를 소망한다. 동네 작은 교회도 추수할 것이 많으니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눅 10:2)라고 기도로 동참하자.

언젠가 이탈리아에 가서 로마 바티칸 박물관과 밀라노 대성당을 본 적이 있다. 건물 자체만 보더라도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지며, 내부 장식만 보더라도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얼마나 많은 돈을 썼을까'였다(점잖게 표현했으니 감정을 실어서 읽어도 무방하다). 지금도 여전히 성당의 역할을 하겠지만, 관광지가 되어버린 듯했다. 이런 곳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그 끝이 어떨지 눈에 보이는 듯하지 않은가.

늦기 전에 깨닫고 돌아서자. 교회들이 관광객들의 감탄사에 취해 건물만을 보존할 것이 아니라, 또한 과거 역사 속 부흥만을 추억 거리로 삼을 것이 아니라, 현실 교회에 부흥이 있기를 소망한다.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이 꿈으로 위대해지기를 소망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동네 작은 교회들이 모여 함께 꿈을 꾸자. 그 시작은 서두에 던졌던 질문에 당당히 답하는 것에서 시작할 것이다. "어느 교회 다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