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레곤 벧엘교회 이돈하 목사
(Photo : 기독일보) 오레곤 벧엘교회 이돈하 목사

광복절 77주년이 되었습니다. 광복(光復)이란 글자 그대로 "빛이 돌아오다"는 뜻입니다. 우리 민족은 1945년 8월 15일 한일합방 후 35년만에 일제의 무조건적인 항복으로 빼앗긴 국권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일제 식민 통치 속에 아들들은 일본군과 노동자로 징집되었습니다, 딸들은 정신대로 끌려가야 했습니다. 자원은 숟가락까지 약탈당하고 더는 우리말을 사용할 수 없고 이름까지 모두 개명해야 하는 가망 없는 어두운 나라에 드디어 빛이 비취기 시작한 날입니다.

한편 우리 성도는 광복절을 맞아 정치적 의미 그 이상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치적인 빛을 넘어 인류와 민족의 역사의 진정한 빛은 예수님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 60:2-3).

실제로 예수님은 자신이 빛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진정한 빛일 뿐만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우리 성도들 역시 세상을 비취는 빛인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마 5:14)." 구체적으로 성도는 "착한 행실"을 통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출 수 있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도와 교회는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는 일부러 착하게 보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한밤에 산속의 집이 멀리서도 보이는 것처럼 빛은 자연히 비취게 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빛은 예수님 한 분입니다. 그분은 태양처럼 빛을 방출하는 "발광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달과 같은 "반사체"입니다. 따라서 빛을 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받으면 자연히 비취게 되어 있습니다.

반사체에게 중요한 것은 크기가 아니라 맑기와 위치입니다. 먼저 맑기가 중요합니다. 거울이 얼룩이 많으면 빛을 반사하기 어렵습니다. 투명해야 빛을 잘 반사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같은 죄로부터 우리 영혼의 거울이 깨끗하게 닦여 있어야 세상에 빛을 제대로 비췰 수 있습니다.

둘째는 위치입니다. 위치는 방향과 거리로 결정합니다. 나의 영혼이 과연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방향입니까? 혹시 뒤돌아 세상을 향해 있지 않습니까? 현재 나의 삶은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까? 관계에서 친밀한 정도는 방향과 거리가 결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가까워도 돌아선 방향이라면 상대의 상태를 알 수 없습니다. 또 바라보고 있어도 서로 간에 거리가 멀면 제대로 소통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빛을 반사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지위, 건강, 재산의 크기가 아니라 주님과 친밀함입니다.

최첨단 과학 문명을 자랑하는 편리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어느 때보다 어둡고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상 기온으로 홍수, 가뭄, 산불이 빈번해지고 있습니다. 버튼 하나만 잘못 눌러도 핵전쟁으로 인류의 종말이 올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구 한쪽에는 이 시대만큼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박해받는 시대가 없습니다. 오픈도어 선교회에 의하면 3억 6천만명에 해당하는 기독교인들이 끔찍한 체포와 고문과 차별로 핍박받고 있습니다. 7명 중에 1명의 기독교인이 가혹한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나이지리아에서는 지난해 4650여명의 기독교인들이 지하디스트 강경 무슬림 무장단체에 의해 순교했습니다. 북한 강제수용소에는 5-7 만명의 기독교인들이 수감되어 있고 20-40만명으로 추산되는 북한 지하교회 교인들이 예배의 자유를 빼앗긴 채 어둠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의 빛을 잃은 2천 5백만 동포들과 중국의 지하교회 성도들, 아프카니스탄, 미얀마, 전쟁의 공포 속에 있는 우크라이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첫 번째 광복절은 정치적 자유의 빛을 되찾을 광복이라면 두 번째 광복절은 분명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이 어두운 우리 영혼과 가정과 교회를 넘어 박해받는 민족과 세계 곳곳에 가득하기를 기도하는 순간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