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일성 정권은 1957년부터 북한 전역에 기독교를 말살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발본색원하여 격리와 추방과 처형을 한 후에는 1946년에 해방 후 소련 군정하에 김일성 공산 정권을 수립하는 데에 전략적으로 설립했던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이었던 관제 기독교 단체를 1960년대에 다시 회생시켜 국제무대에 등장시켰다. 북한의 공산정권 수립일인 1948년 9월 19일 이후 사실상 조선기독교도연맹은 폐쇄된 것이었다.
조선기독교도연맹의 대표였던 강양욱 목사는 1963년 10월에 조선기독교도연맹의 대표로서 공산권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세계평화이사회'와 같은 해 11월에 열린 '평화옹호민족위원회'에 참여하여 사회주의 국가들의 종교 단체들과 평화 운동으로 연대하였다. 뿐만 아니라 1961년 5월에 김일성의 발기로 북한 정당 사회단체 및 각계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여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종교 단체들도 참여했다. 이는 기독교 단체를 비롯한 종교 단체를 북한 정권의 체제 유지와 대외적 선전 도구로 상황에 따라 전략적으로 이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증거로서 1972년 남북 간에 '7.4공동성명'이 발표된 후 북한 사회에서는 반종교 선전이 상대적으로 악화되고 민족 통일을 위한 통일 전선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기류 변화에 발맞추어 1970년대 이후 기독교도연맹은 한편으로는 정치적 관심을 남한 사회와 교회에까지 전략적으로 확장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6.25 전쟁의 발발과 함께 문을 닫은 기독교 신학교를 계승하는 3년제 '평양신학교'를 20여 년 만인 1972년 다시 개설함으로써 대내외적으로 교회 조직의 구축과 유지를 위한 점진적 활동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교회 성립의 기반은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에 있으므로 신학교가 없는 교회는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평양신학교를 세운 후 1988년에야 만경대 근처 봉수 지역에 봉수교회를 건축하여 그 땅에도 교회가 있음을 대외적으로 보여 주었다. 1972년 9월 강양욱 목사는 대남 공세를 취하기 위해 최초로 남북한 기독교인들이 접촉할 것을 제의했다. 그는 그해 12월에 사회주의 헌법 공포와 함께 신설된 주석 제도에 따라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이는 그이 대외적 활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기도 한 것이었다. 1974년 8월에는 '조선기독교도연맹 중앙위원회'가 남한의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남한 정부의 조치를 비난하는 성명을 내었다. 이로써 한국내의 정치적인 문제에 관여함으로 통일전선의 대남 전략을 위한 선전 도구로 이용하였다.
나아가서 국제적으로 그 활동 영역을 더욱 활성화하였다. 1975년 1월 인도 고타얌에서 열린 '아시아 기독교평화회의'와 1976년 11월에 체코의 브르노에서 열린 '세계기독교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이 회의들이 한반도 문제에 대한 결의문을 채택하도록 했다. 1974년 8월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 신청서를 내었다.
이러한 정치, 외교적 동선은 분명히 북한 정권의 통일전선 구축 사업의 일환으로써 종교 기관을 통한 대남 사업을 전면에 포진시켜 대남 전선 기관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대외적으로 공산권 국가들과 제3세계 국가들과 연대하여 국제무대에서 자국의 위상을 확립하고 나아가서 대남 사업의 창구를 활용하여 통일전선의 전략적 차원에서 국제무대에 기독교 어용 기관을 등장시킨 것이다. 또한 남한 정부에 대해서는 대남 사업을 본격화한 것이기도 하다. 즉 북한 공산 정권은 기독교를 그들의 정권 유지와 대내외적 정당성 확보와 남한 정부와 교회의 침투와 혼란을 위한 전략적 카드로 활용한 것이었다.
이처럼 김일성 정권은 1970년대에 와서 자신의 국내적인 정치 기반의 안정과 경제 분야에서도 앞서가게 되자, 다시 관제 기독교 단체를 통해 대외적 활동을 활성화하며 남한에 대해서는 정치적 공세를 취할 수 있는 종교 단체를 양성화하였다. 이를 위해 평양신학교 설립과 조선기독교도연맹을 재등장 시킨 것이다. 1960~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그 땅에는 공식적인 교회라는 것이 없었고 성경조차도 출간한 바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기독교도 연맹과 평양신학부만 정치적 목적으로 세워졌을 뿐이었기에 매우 모순적이며 기형적인 관변 조직에 불과하였다. 이 평양신학교는 사실상 통일전선부의 요원들의 양성이었으며, 철저히 관련 기관의 주도하에 신학생들이 선발되어 3년 과정으로 공부하게 하였다.
이 신학교는 강양욱 목사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사료된다. 이 신학교는 1987년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에 종교학과를 두고 거기에서 신학생을 양성시키었다. 처음에는 5명으로 출발하여 그 후 20여명 가량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97년 김일성이 사망한 후에는 폐교되었다가 외국의 기독교 단체들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기 위해 2000년 9월부터 다시 신학원을 개원하였고, 3년제에서 5년제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수업은 대부분 통신강좌로 진행되었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신학생 거의가 통전부나 해외동포 영접국 등 대남 적화 기관에서 근무하는 요원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학교의 강사진들 중에는 미국 시민권자인 홍동근 목사가 1990년 11월부터 강의를 하였고 대부분의 강사진들은 김일성대학내의 교수진과 조선기독교도 연맹의 중직자들로 구성되었다. 학교 건물은 김일성대학 내의 건물이 아니라 조선기독교도연맹 사무실이나 봉수교회에서 강의가 진행되다가 2003년에 한국과 미국의 교회들이 지원하여 자체 건물이 완공되었다. 그 당시 신학생은 12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들 학생들은 이미 김일성대학 종교학부나 평양외국어대학과 평양음악무용학교 출신들로 고급 간부들의 자녀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