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효 목사
장재효 목사(서울 성은교회)

(본문)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 대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본문은 교회의 형제가 죄 짓는 것을 보았을 땐 그 사람과 단 둘이 만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죄를 회개할 수 있도록 권면하고 또 하나님 앞에 함께 기도하면서 용서받을 수 있도록 선도해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 사실을 부인하고 양심을 속이며 오히려 상대를 욕하고 권면을 배척한다면 그 사람의 잘못을 아는 같은 교회 성도 두세 사람과 함께 말마다 증참(증인으로 참여하게 함)하게 해서 그 사람의 죄를 알고 있음과 이 죄로 말미암아 피해를 준 상대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보상해야 할 것은 철저히 보상하고, 용서를 받고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받아야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는 고사하고 도리어 화를 내고 패악한 반응이 나오면, 교회에 말하고, 즉 목자에게 말을 해서 예수님을 믿고 하늘 소망을 가꾸자는 성도들 앞에서 그 사람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종용해서 그 영혼을 살리도록 힘써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교회 회중이 기도하고 권면을 해도 듣지 아니하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취급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내 보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교회 오는 목적이 예수님을 믿고 천국 가겠다는 영적소망의 신앙으로 오는 것이 아닌 것으로 확증되어졌기 때문입니다.

21절에 베드로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하며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 당시 랍비들의 의식 속에 세 번까지 용서해 주는 것으로 한정되어 있었던 시대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일곱 번 까지 용서하는 아량을 보이며 물었던 것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하십니다. 이 말씀은 490번까지 용서해주라는 의미가 아니라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말씀이십니다. 상대가 너의 권면을 받고 회개만 한다면 무제한으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는 죄 지을 근성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본문 23절부터는 예를 들어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임금의 종이 일만 달란트(장정이 삼십 삼년간 일해서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돈)를 빚졌는데, 불쌍히 여겨 탕감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돌아가는 길에 그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이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를 본 동관들이 엄청난 금액을 탕감받고 돌아오던 길임을 알기에 그의 하는 일이 심히 민망하여 그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보고했습니다. 이를 알게된 임금은 그 종을 다시 불러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고 하며 꾸짖어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졸들에게 맡겼습니다.

35절에"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하셨습니다.

신명기 19:15~19에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만일 위증하는 자가 있어 아무 사람이 악을 행하였다 말함이 있으면 그 논쟁하는 양방이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당시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설 것이요 재판장은 자세히 사실하여 그 증인이 위증인이라 그 형제를 거짓으로 무함한 것이 판명되거든 그가 그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 한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일이라도 온전히 사실을 확인한 후 처벌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이후부터는 이런 악을 너희 중에서 다시 행하지 아니하리라(신19:20)"합니다.

야고보서 3:2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에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실수가 많습니다.

심지어 하지 않은 말까지 보태가며 사람을 이간질하고 모함하기도 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 일이 생겼을 땐 먼저 용서를 빌고 다가서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선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자세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차원이 더 성숙된 사람이 예수님 닮은 표시를 먼저 나타낼 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상대의 잘못이라고 다투게 된다면 그 둘 모두가 하나님 앞에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26에는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하셨습니다.

진심으로 네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네 죄 또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용서받을 생각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온전한 용서의 유익은 상대방에 있는 것인지 내게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행한 작은 죄라도 그것을 용서하고 오히려 그를 위하여 베풀고 위로하며 그 사람의 그릇됨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으로 깨달아 알 때 하나님 앞에 칭찬받는 사람이 될 것이며 계속해서 쓰임 받는 하나님의 종이 될 것입니다.

작은 일에도 자존심을 내세우며 결코 그 상대에게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서로 대립하다가는 결국엔 서로가 마귀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하늘에 소망을 둔 사람들은 무슨 일을 당하든지 하나님 앞에 감사가 먼저 나올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억울함과 힘겨움 속에서 하나님이 내게 큰 위로함의 뜻을 세우셨음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 각자는 자신이 용서받고 용서해야 할 사람들을 기억하여 사람과 사람사이의 매듭을 온전히 다 푼 다음에 하나님 앞에 죄악으로 매듭지어진 많은 매듭들을 풀어달라고 간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기본이라고 생각하시고 서둘러 살피시기 바랍니다.

모든 피조물은 조물주인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 피조물을 욕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뭐 저런 것을 만들어 놓았냐고 푸념하는 것과 같고 결국 하나님을 능멸하는 것과 같게 됩니다.

상대편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고, 할 수 있는 한 도우며,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상대에게 베풀고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가 자신에게 일백 데나리온(만분의 일)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해서 도리어 옥에 갇힌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도 또한 그렇게 될 것입니다. 탕감받을 수 있었던 자신의 죄를 자신에게 지은 작은 죄를 용서하지 못해 하나님 앞에 자신의 큰 죄 또한 용서받지 못하고 죄 값을 치루고 마는 어리석음이 없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