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버스 설정, 진부한 캐릭터에 참신성 부여
연관 작품 중요해져, 슈퍼히어로물 판매 증가
빌런들과 싸울 뿐 아니라 다른 자기와도 투쟁
자유의지 올바른 활용 촉구하는 점에선 유익
◈멀티버스와 코믹스: 슈퍼히어로 코믹스 서사에 참신성을 더한 다세계 해석
마블의 새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그 제목이 명시하고 있듯이 멀티버스, 즉 다중 우주를 핵심 설정으로 채택하고 있다.
다중우주의 존재에 대한 가정은 1956년 프린스턴 대학교 물리학 박사학위 신청자였던 휴 에버렛 3세의 학위논문 '양자역학의 상대 상태 공식화(Relative State Formulation of Quantum Mechanics)'에서 처음 제시됐다.
에버렛이 다세계 해석(many-worlds interpretation)을 주장했던 것은 닐스 보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등이 제시한 코펜하겐 해석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아원자 세계에 대한 관측이 이루어질 때 그 영역을 지배하던 파동함수는 붕괴된다(wave function collapse). 파동의 형태로 양자 중첩 상태에 있던 전자는 하나의 특정 지점에 위치하는 입자 상태로 전환된다.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이렇게 관측에 의해 파동함수가 붕괴되는 사태의 보다 깊은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단지 현상적으로 그렇게 체험될 뿐이라는 것을 밝혀내는 데 그쳤다.
에버렛은 파동함수가 붕괴되는 것이 아니라 그 파동함수에 담긴 여러 가능성들이 동시에 모두 현실화되는 세계들이 존재할 것이라고 가정했다. 이를 통해 그는 '이론적으로' 파동-입자 이중성의 모순을 해결해보려 하였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에버렛의 이론은 당대 양자역학의 대표자들, 특히 닐스 보어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그렇게 다세계 해석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으나, 1970년대 '양자 얽힘' 개념이 각광을 받게 되면서 이 양자 얽힘 개념과 깊게 연관된 다세계 해석 역시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원래 다세계 해석은 미시 세계에서의 사태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이었다. 하지만 미디어 콘텐츠 업계에서는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서 이를 거시세계 영역까지 확대 적용하는 데 앞장섰다.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슈퍼히어로 코믹스였다.
다세계 해석은 기존 슈퍼히어로들의 설정을 재활용하면서 부분적 참신성을 더하는 데 안성맞춤인 이론이었다. 특히 슈퍼히어로 시리즈 각 회차별로 스토리 작가가 수시로 변경되는 업계 특성에 잘 들어맞았다.
1930년대 등장했던 슈퍼히어로 캐릭터들은 1950년대 들어 이미 창안된 지 20년 지난 고전 캐릭터가 된지 오래였다. 그들의 정체성과 능력, 성격은 이미 팬들의 마음 속에 하나의 확고한 틀로 굳어졌다.
그래서 슈퍼히어로 코믹스는 골수팬들만 좋아하고 새로운 고객층을 겨냥하지 못하는 콘텐츠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렇게 상업적 이익이 정체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960년대에 가드너 폭스를 필두로 코믹스 스토리 작가들이 에버렛의 다세계 해석을 가져와, 슈퍼히어로들의 거시세계에 직접 적용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작가들이 노렸던 효과는 기존 슈퍼히어로들의 굳어져버린 정체성을 허무는 것이었다.
▲서로 다른 세계의 다른 자아와 만나는 스칼렛 위치 완다(엘리자베스 올슨 분). |
◈멀티버스와 정체성: 정체성 혼란을 유도하는 다세계 해석
각각의 슈퍼히어로는 삶의 중요한 분기점을 맞이한다. 그리고 여기서 다세계 해석의 유니터리 진행이 일어난다.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선택을 한 여러 개의 세계가 분화되어 존재한다.
이로써 각 코믹스 등장인물들이 지금까지 보여주지 못한 새로운 삶의 방식, 성격, 능력 등을 보여주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다른 세계들에 존재하는 동일한 슈퍼히어로들이 서로를 만나고, 대화하고, 협력하고, 때로는 대립하거나 격투를 벌이기까지 한다.
지금에 와서는 이런 방식도 고전적인 서사 기법이 되어버렸지만 1960년대 당시에는 꽤 획기적인 아이디어였으며, 슈퍼히어로 장르의 인기를 되살리는 데 일조했다.
1950년대 인기가 크게 시들었던 슈퍼히어로 콘텐츠는 1960년대 들어 '실버 에이지'를 맞이하며 인기가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다.
멀티버스라는 설정이 '실버 에이지'를 이끈 핵심 동력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슈퍼히어로 코믹스 서사에 참신함을 더하는 데 힘을 보탠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멀티버스 설정으로 각 캐릭터들이 존재하는 세계들을 그럭저럭 엮을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서로 연동된 슈퍼히어로 코믹스의 판매고가 증가하는 효과를 얻었다. 어느 한 쪽의 서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다른 슈퍼히어로 시리즈의 서사를 알아야 했기 때문에, 팬들이 연관된 코믹북을 같이 사서 읽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캐릭터가 여러 다른 세계에서 서로 다른 선택에 따라 살아간다는 설정은 각 슈퍼히어로의 정체성 붕괴로 이어졌다.
각 캐릭터가 지녔던 단편적이고 만화적인 스테레오타입이 약화되고, 입체적 성격이 부각되었다. 멀티버스에 노출된 캐릭터들은 이제 빌런들과 싸울 뿐 아니라 다른 세계의 자기와도 갈등하고 싸워야 했다.
▲다른 우주에서 좀비가 되어버린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 분). |
이렇게 인간의 일원적 정체성을 허물고 중층적 다원성을 내세우는 방식은 당시 문화예술계를 점진적으로 지배해 나가고 있었던 포스트모던 사조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앤디 워홀의 1962년작 <마릴린 먼로 두 폭>(Marilyn Diptych)은 한 인격의 중층적 다원성을 표현한 대표적인 포스트모던 미술작품이다. 동일한 실크스크린을 여러 다른 색으로 중첩해 붙여서 동일한 한 사람 안에 얼마나 다양한 색채의 성격이 들어있는지를 표현했다.
이것은 한 사람 안에 무수한 삶의 방식을 선택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포스트모던 문화사조의 주제의식은 에버렛의 다세계 해석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마블 코믹스에 이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도 그동안 쌓아올린 여러 작품들의 서사구조를 토대로 본격적으로 멀티버스 설정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2016년의 <닥터 스트레인지>가 그 출발점이었다. 작년 12월 개봉된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과 이번에 개봉된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서사에서는 멀티버스 설정의 지배력이 더 높아졌다.
각 멀티버스의 닥터 스트레인지, 그리고 스칼렛 위치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지만, 각자가 처한 서로 다른 환경에 의해 종래에는 전혀 다른 처지에 놓이고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갖게 된다.
이로써 각각의 캐릭터는 커다란 정체성 혼란을 겪게 되고 자신 안에 내재된 다양성을 직시하게 된다.
이런 정체성 혼란은 한 사람에게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하며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일 수 있다. 즉 자유의지의 올바른 활용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유익할 수 있다.
그러나 정체성 분열과 혼란은 기독교 신앙 입장에서는 결코 유익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은 이리저리 분산된 자아에 대한 이해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로 통일하고 집중시키는 데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정체성 혼란을 완벽하게 종식시키고, 도저히 흔들 수 없는 확고한 정체성, 하나님의 계명과 은혜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키는 데 전념하는 삶을 살도록 한다. <계속>
▲서로 다른 특성과 능력을 가진 다중우주의 닥터 스트레인지들. 슈퍼히어로의 정체성 혼란과 붕괴를 보여준다. |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