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기독교회연합회장 황경수 목사
(Photo : 기독일보) 시애틀기독교회연합회장 황경수 목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여러 가지 신비한 것이 있습니다. 몇 년 전 캘리포니아의 어느 황량한 들판에 장대비가 내리자 수십 년 동안 사막으로 알고 있던 곳에 파피꽃이 피어 장관을 이루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땅속에서 7년을 지내던 굼벵이가 어느 날 매미가 되어 푸른 하늘을 나는 것처럼 생명의 신비는 우리가 영원히 신비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연계와 생태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부활을 계시하십니다.

죽음의 신비도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옛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라져버린다. 없어진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말에는 돌아가셨다고 말합니다. 어디로 돌아갔다는 말입니까? 이 땅에서 사는 날은 잠시 머무는 곳이고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신비롭습니다.

또한 부활의 신비가 있습니다. 부활 그 생명 자체가 신비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신비란 없습니다. 창조라고 하는 역사가 하나님께는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하나님 앞에는 다만 창조의 역사가 있고 생명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에스겔 선지자를 데리고 어느 골짜기 한 가운데 두셨습니다 그 골짜기에는 너무도 참담하고 비참한 아주 말라 비틀어진 뼈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뼈들은 대단히 오랫동안 뜨거운 태양 아래 놓여 있었고. 그 뼈에는 전혀 생명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의 귀를 열어 듣게 하시고 에스겔에게 질문하십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회생 가능성을 묻는 것입니다.

인간의 문제가 하나님께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불가능이 하나님의 가능입니다. 인간은 죽음에서 끝나지만 하나님은 이 절망적인 상황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음을 일으켜 영원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부활은 생명의 신비입니다. 생명이 사실이고 죽음이 사실이듯이, 부활은 사실입니다. 설명 여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사실적 증거입니다. 성경에서 부활이라는 말은 변화라는 말로 더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죽음으로의 변화, 생명으로의 변화, 그리스도적 생명으로의 변화가 있습니다.

부활생명 안에서 사망을 이해하고 부활생명 안에서 생명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의 세계관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부활신앙 안에서 세상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 믿는 초대교회 사람들은 원수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부활신앙으로 사는 자는 모든 것을 부활신앙 안에서 해석하고 다 소화합니다. 부활의 소망으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얼어붙었던 대지에 봄이 되면 싹이 나는 것도 메말랐던 나뭇가지에 새순이 나는 것도 모두 생명의 힘입니다. 생명은 승리합니다. 죽음을 이깁니다. 부활의 생명은 사망을 정복한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성도의 어떤 죽음도 패배가 아니라 승리의 노래이며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관문이요 주님 오시는 날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준비일 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2, 000년 전에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여전히 우리 가운데 살아계십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나와 함께 계시고 나와 동행하고 계시고 나와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전세계가 바이러스로 인해 경제가 파탄이 나고 모든 것이 멈추어서 두려움 속에 하루하루를 지내지만 부활의 아침 부활의 기쁨은 가두지를 못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에게 부활의 승리와 기쁨과 소망이 성취되는 축복이 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