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과 성경: 의인 열 명을 찾는 아브라함의 대중문화적 변형
배트맨 시리즈의 신작, <더 배트맨>이 3월 1일 개봉한다. 배트맨 시리즈는 슈퍼히어로 장르 서사들 가운데서도 대단히 독특한 성격과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이 시리즈는 밝고 활기차고 성공 가능성으로 가득찬 아메리칸 드림을 표현하는 마블 슈퍼히어로 시리즈와 정반대의 위치에 서 있다. 죄악, 트라우마, 어두움, 비리와 부패, 그리고 잔혹한 폭력, 이런 어두운 요소들을 활용해서 죄악과 묵묵히 싸우는 한 영웅의 이야기를 지어낸다.
이런 독특한 매력 때문에 배트맨 시리즈는 상당히 방대한 분량을 차지하는 서사로 발전됐다. 코믹스 그래픽 노블 당시에도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 같은 흥행 라이벌 히어로들을 능가하는 수의 작품이 발표되어 흥행가도를 달렸다.
슈퍼히어로 영화 역사에서도 엑스맨 시리즈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등장하기 이전부터 이미 흥행이 보장된, 잊혀질 만하면 다시 등장하는 슈퍼히어로 최고 인기 캐릭터가 배트맨이다.
DC코믹스 입장에서는 슈퍼맨 시리즈와 함께 수익의 상당부분을 담당하는 IP인만큼, 배트맨 시리즈의 명맥을 온전하게 이어가려 노력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가 여러 감독에 의해 다양한 시각으로 재해석된 배트맨의 모습이다.
팬덤에서는 1960년대까지 만들어진 배트맨 실사 영화와 드라마를 실버 에이지 시리즈에 포함시키고, 1989년 이후 만들어진 것들을 모던 에이지 시리즈로 분류한다. 배트맨의 복잡미묘한 심리와 그가 범죄 소탕을 위해 활용하는 첨단 무기와 장비, 그리고 빌런들의 악행을 제대로 묘사하기 시작했던 것은 특수효과 기술이 크게 발전된 모던 에이지 시리즈였다.
팀 버튼, 조엘 슈마허, 크리스토퍼 놀란, 잭 스나이더, 그리고 이번 <더 배트맨>의 맷 리브스 같은 유명한 감독들이 계속해서 배트맨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뿐만 아니라 배트맨의 협력자나 그와 대적하는 빌런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도 간간이 제작되었다. 영화 <캣우먼>, TV 시리즈 <고담>, 그리고 <조커> 등을 통해 배트맨 주변인물에 대한 재해석도 시도되었다.
▲배트맨 영화들 가운데 흥행과 평론 양면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작품,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
배트맨 시리즈가 처음 창안된 것은 1939년 3월로, 2차 세계대전이 불과 반 년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자 미국 사회가 대공황의 참상에서 조금씩 벗어나려고 하던 불안한 시기였다.
배트맨 캐릭터의 창안자는 화가 밥 케인과 작가 빌 핑거였는데, 이들은 불과 한 해 전(1938년) 발표된 슈퍼맨 시리즈의 커다란 성공에 고무된 코믹스 편집자들의 요청을 받아 배트맨 캐릭터를 창안했다.
많은 대중문화 학술연구자들이 분석한 것처럼, 슈퍼맨 시리즈의 서사는 기본적으로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핵심 모티프로 삼아 창안된 것이다.
비록 세속화 물결에 밀려 상당히 약화되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독교 문화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1930-1940년대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배트맨 시리즈의 서사 역시 대중문화 및 인문학 연구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특히 2008년 <다크 나이트>의 전례없는 성공이 배트맨 시리즈 서사에 대한 인문학적 연구의 붐을 일으켰다.
이들이 분석한 대로 배트맨 캐릭터를 창안한 두 사람 역시 서사의 기본 설정과 캐릭터 모티프를 성경에서 차용했다.
슈퍼맨 시리즈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일대기를 주로 참고했다면, 배트맨 시리즈는 구약 아브라함의 생애에 관한 기사, 특히 소돔과 고모라 기사를 주로 참고했다.
◈배트맨과 죄악: 진중하고 암울한 죄악과 폭력 묘사의 성경적 배경
죄악에 물들어 도덕적으로 구제가 불가능한 도시 고담(Gotham)은 소돔(Sodom)과 고모라(Gomorrah)의 합성어이자, 오늘날 세계 최대 대도시 가운데 하나인 미국 뉴욕의 자화상이다.
이 도시는 그 타락상 때문에 그림자 동맹(the League of Shadows)의 단죄 위협에 놓여 있다. 그림자 동맹은 고담 시 주민들을 말살하려 하지만, 역시 그림자 동맹의 일원이었던 배트맨 브루스 웨인은 고담 시에 갱생의 희망이 있다며 이들을 막아서려고 한다.
배트맨 서사의 프롤로그격인 이 그림자 동맹의 이야기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절시키기 위해 도시로 들어간 두 천사(창 19:1)와 두 도시의 멸망을 막아보려 의인 열 명을 고한 아브라함(창 18:32)의 서사를 변형한 것이다.
브루스 웨인, 그리고 그와 뜻을 함께하는 동료들(알프레드 페니워스, 루시우스 폭스, 제임스 고든, 셀리나 카일, 로빈 등)이 도시의 멸망을 막는 의인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렇게 성경의 소돔과 고모라 기사를 차용한 탓에, 배트맨 시리즈 전반의 이야기는 어둡고 무겁다. 특히 배트맨의 활약이 미치지 못하는 고담 시 구석구석에 대한 묘사는 말 그대로 죄악, 부패, 욕망, 증오로 뒤범벅된 저열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도시라는 공간 속에 충만한 죄악의 참상을 표현하는 데서 배트맨 시리즈를 능가하는 히어로물은 거의 없다. 굳이 예를 들자면 <왓치맨>, <신 시티> 시리즈 정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배트맨 시리즈와 함께 어둡고 암울한 슈퍼히어로 서사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왓치맨> 시리즈. |
이번에 개봉되는 <더 배트맨> 역시 이런 시리즈 전통을 이어간다. 현재까지 공개된 예고편으로만 봤을 때는, 배트맨이 연쇄 살인마 리들러의 광기어린 살인행각을 저지하다 인간의 원초적 죄성, 악의의 본모습을 목격하고는 잔혹한 복수자로 돌이키는 서사가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성경의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을 피하지 못했다. 의인이 롯과 그 가족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인 열 명을 고한 것은 롯과 그 가족, 그리고 혹시 하나님을 경외할지 모르는 숨은 의인들을 위함이지 두 도시에 넘쳐나는 악인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배트맨 시리즈의 서사도 이처럼 의인을 보살피고 악인의 형벌을 당연시하는 성경 속 엄준한 심판의 모티프를 빌려온다.
브루스 웨인은 선량한 동료들과 시민들에게는 한없이 친절할 뿐 아니라 실질적인 사회적, 경제적 도움도 제공한다. 고담 시 최고 재벌기업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막대한 사회적, 경제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브루스 웨인은 가난한 스파이더맨처럼 단순히 선량한 시민들을 위기에서 구해주기만 하는 것을 넘어, 시민들의 복지와 극빈자, 고아들의 구제에도 적극적으로 힘쓴다.
하지만 브루스 웨인은 악인들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모습을 보인다. 어떤 악인이라도 목숨을 거두지는 않는다는 자기만의 기준이 있기는 하지만, 필요한 경우 악인들을 처단하고 징벌하는 데 상당히 잔혹한 방식의 폭력 사용도 주저하지 않는다.
배트맨 영화들의 폭력 묘사는 미묘한 방식으로 인간의 비열함과 악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데 특화되어 있다.
배트맨 시리즈 속 폭력의 규모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히어로들의 활극과 빌런들의 침략상을 따라오지 못한다. 하지만 각 사람이 범죄의 희생양이 되는 장면, 그리고 그 범죄자들을 처단하는 장면 속 심리묘사의 어두움과 깊이에 있어서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활극과 폭력 묘사를 압도한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수천, 수만 명이 죽어나가는 외계인의 침략 장면이, 배트맨 시리즈에서 조커가 무고한 시민 한 명을 살해하는 장면보다도 훨씬 가볍게 느껴진다.
악인의 범죄와 그 처단을 이처럼 무겁고 어둡게 그려낸 점은 배트맨 시리즈가 지닌 고유한 강점이다. 이것이 매력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뜻과 은혜로부터 멀어진 인간의 내면과 삶의 본모습을 절실하게 느껴지도록 그려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죄악을 넌더리날 정도로 자세하고 암울하게 그려내는 방식은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죄악의 본모습을 가르쳐주는 방식이기도 하다.
즉 배트맨 시리즈의 암울한 죄악과 폭력 묘사는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에 만연한 죄악의 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부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죄악과 폭력 묘사에 깊이와 진중함을 갖춘 <더 배트맨>. 성경에서 죄를 바라보는 시각을 반영한다. |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