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을 전후하여 일제강점기 중에 조선에 새로운 사조인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가 지식층과 기독교인들 중에도 새로운 사상에 탐익하며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졌다.
이는 유럽에서 새롭게 부상하기 시작한 칼 막스와 엥겔스에 의한 공산주의 사상의 확장과 레닌에 의한 러시아의 공산 정권 수립이 유럽과 미주와 아시아에도 적지 않게 그 영향을 주었다. 특히 조선에서는 나라를 빼앗긴 좌절감과 그로인한 새로운 사상과 체계의 출구를 찾는 식자층들에게 매우 매력적이었으며 기독교 지도층과 청년계층에도 큰 영향을 주기 시작하였다.
지역적으로는 러시아 연해주로서 그곳에 20만 명 이상의 카레아스키(고려인)라고 불린 조선인들이 많았으며 두 번째로는 나라를 찾고자 의기투합한 독립운동 인사들에 의해 1919년 4월에 수립된 상해임시정부의 요인들이 있었다. 그 중에 김구, 손정도, 이승만 등 많은 기독인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 이념적으로는 사회주의 사상에 빠진 인사들이 이동휘, 김립, 여운영 등 태반이었다.
국내에서도 언론계와 식자층들 중에도 새로운 사조인 공산주의 사상에 몰입된 인사들 있었으며 전국적으로 그 조직을 확대하였다. 언론계에서는 3.'1운동을 전후하여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칼 막스 사상개요과 유물사관" 등이 연일 게재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마치 새로운 복음인양 대중화 되었고 교회에도 청년계층들이 심취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반 교회세력으로 점차 외연을 확장하였다.
1925년에는 제1차 조선공산당이 비밀리에 결성되었다. 해외에서는 러시아에서 고려인 중심의 고려공산당이 조직되었고 중국 상해에서는 상해파 고려공산당으로 양분되었다. 1926년에는 3,380개의 단체와 2십여 만 명의 조직원으로 확대되었다. 이들의 주장은 일제의 타도, 조선의 독립, 8시간 노동제실시, 최저 임금제, 실업자 구제, 집회 결사의 자유, 조선인 관리의 퇴직, 일본인 교육의 거부, 일본인 상인과의 관계 단절 등은 그 당시로 볼 때는 매우 비현실적인 구호였지만 사회의 저변 계층들에게는 매우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며 이에 동조된 노동자와 농민들은 그 조직을 확대해 갔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은 한편으로는 민족주의를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반기독교운동을 등에 업고 세력을 넓히면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공산주의에 의한 기독교 공격은 혹독할 정도로 파괴적이고 혁명적이었다. 그들의 기독교에 대한 주장은 매우 파괴적이었다. "기독교는 제국주의자들의 영토확장에 주축이 되고 자본주의 국가를 옹호하는 데 무기가 때문에 기독교를 파괴함이 곧 계급 해방이며 미신의 관념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라 하였다. 이에 선동이 된 공산당 청년들은 예배 훼방과 목사 구타를 하기도 하였다.
1926년 감리교연회록은 공산주의로 인한 기성교회의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 준다. "현재 기독교의 확장을 저해하는 조직과 운동이 퍼져 있다. 국내 신문에는 반기독교에 관한 기사가 넘쳐있다. 어떤 청년들은 예배 시간에 일어나서 설교를 방해하고 신앙을 방해하는 투쟁을 벌인다. 이런 반대는 지금 대중 속에 퍼지고 있는 공산주의 사상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당시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공회에서도 보고서에서 조선의 젊은이들이 밀려오는 무신론과 볼세비키즘과 회의주의적인 서적들을 닥치는 대로 읽을 유혹에 빠질 것은 명백하다."라고 당시 교회의 위기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1932년 '코리아 미션필드'에서 사회주의 영향력과 퇴폐적 문화 이입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하였다. 조선의 주요 신문사의 기사 중에는 프로레타리안니즘과 에로티시즘을 대변하였다. 심지어는 고등학교에서도 학생들은 공산주의 서적을 탐독하였다" 라고 하였다.
이처럼 공산주의 만연과 퇴폐적 문화의 유입은 수많은 젊을 엘리트들이 신앙에서 멀어져가게 하였다. 분명한 것은 3,1만세운동 이후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등장으로 교회에도 많은 타격을 주었으며 일부 청년들을 교회를 떠나며 무신론자가 되며 공산주의자가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