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바벨론 시대에 교회가 점점 교회다움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바나 리서치의 대표 데이빗 키네만이 지적한 것 중의 하나가 나에게 큰 도전을 주었습니다. 교회가 성도들에게 너무 작은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일까요? 성도들이 너무 바쁜데, 특별히 코비드 19 으로 말미암는 세계적인 전염병으로 성도들이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져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목사와 교회는 성도들에게 강하고 담대하게 성경적인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냥 교회에 나오기만 해도 된다고 합니다. 벌써 20 여 년 전에도 체험하였던 일들입니다. 예배 후에 한 새가족이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좀 너무 하시네요. 제가 주일날 하루 쉬는 날에 쉬지도 않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데 목사님은 저보고 죄를 회개하라고 하지, 용서하고 살라고 하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지, 도대체 왜 이렇게 달달 볶아요. 제가 멸치로 보이세요?! 왜 자꾸 까세요. 제가 알밤이에요?!'
정말 힘들게 살아가는 이 시대의 디아스포라 성도들을 나는 너무 심하게 들볶는 목사인지, 세상이 자꾸 하나님을 떠나기 원하고, 디지털이 그들의 신이 되는 세상에 과연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설교하여야 하는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위기가 닥칠 때는 도전하여야 하고 깨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도, 배를 타도 제일 먼저 소통하는 것이 위기가 닥치면 내가 살고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꼭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소통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왜 잠잠하여야 하고 목사는 왜 눈치 보며 침묵 하여야 하는지. 살려야 합니다. 깨워야 합니다. 도전 하면 분명히 응답이 따라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성도, 살아있는 교회는 사랑을 말하지 않고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되고 성도가 성도되려면 사랑을 흘려 보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를 구하시려 독생자를 주시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느낌을 넘는 굳은 결심의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게 결심 (눅 9:51) 하신 후 예루살렘에 가서 십자가에서 화목제물로 드릴 결단을 행동으로 옮기셨습니다.
그렇게 살림 받은 나 이기에 나도 남을 살리기 위하여 나를 화목제물로, 내가 먼저 드림으로 예수님의 사랑이 나를 통하여 오늘 흐르게 하여야 합니다. 디지털 바벨론 시대는 정보가 넘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흘려 보내라! 사랑으로 삽시다. 내가 먼저 드립시다. 끝까지 품으며 사랑을 흘려 보냅시다! 나는 살아있는 자입니다. 생명을 던지십시오! 주님이 그 생명으로 나를 살렸듯이!
호성기 목사 (필라 안디옥교회 담임, PGM 국제대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