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에서 최초로 목사가 된 사람은 평양 남산현교회를 홀 선교사와 함께 개척한 김창식(金昌植, 1857~1929)이다. 그는 황해도 수안군 성동면에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하며 성장한 김창식은 농사일을 하다가 21살에 세상을 알기 위해 전국을 다니며 방랑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서양 사람들이 아이들의 눈을 빼어 만든게 사진기라는 괴 소문이 파다하였다. 이는 반개화파인 수구파들이 만들어 낸 악의적 소문이었다.
김창식은 이 소문을 듣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미국 북감릭 선교사 올링거(F.Ohlinger) 의 집에 잡부로 취직해서 선교사의 사생활 일체를 철저히 감시하면서 그들의 불미스런 행동을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소문의 해괴한 일을 찾아 낼 수 없었다.
김창식은 오히려 올링거 선교사 부부의 인격과 신실한 생활에 감화를 받고 그의 마음이 열리게 되었다. 그는 올링거와 아펜젤러 선교사로부터 마태복음을 비롯한 4개 복음서와 '셩경 초등문답' 등의 교리를 배웠다.
마침내 김창식은 1890년 세례를 받고 1892년 봄, 미국 감리회 조선선교회에서 정식으로 임명받은 전도사가 되었다. 그후 1893년 올링거가 미국으로 돌아가자, 미 감리교 의료 선교사인 홀이 그를 대신하여 1891년 12월에 조선에 오자 그의 개인 비서겸 조사가 되어 평양으로 갔다.
평양 서문밖의 어느 기생집을 사들여 진료소를 겸한 예배당을 마련하고 그해 8월 김창식은 홀과 함께 평양지방에 정식으로 파송되어 순회 전도를 시작하였다. 당시 홀 선교사는 신혼이었고 외국인이 장기 거주가 불가하자 한성과 평양을 오고 가는 왕래하는 사역을 하였다. 그로인하여 김창식은 교회업무 등을 도맡아 함으로 선교사의 업무를 충분히 이해하면서 감당하게 되었다.
한편 1894년5월 수구파였고 민비의 일가인 평양 감사 민병석이 평양에 기독교가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서양 선교사를 돕는 장로교 한석진 조사와 감리교 인 8명과 김창식을 평양 관아로 압송하여 배교를 강요하며 고문을 하였다.
그러나 한석진과 김창식은 "나는 기독교가 옳다는 사실을 안 이상 기독교 신자로 살 것이며 또 복음을 전하겠다"고 고백을 계속하자 거의 죽음의 지경에 이르도록 고문을 당하였다. 선교사들은 전보를 통해 미국과 영국의 공사에게 알리어 이를 강력히 항의하여 저들이 풀려나도록 요청했다. 마침내 조정에서는 어명을 내리어 저들이 풀려나도록 하였다.
이때 마팻 선교사가 그 어명을 받아 가지고 평양으로 가서 "여기 어명이 있소!"라고 외쳤다. 그로인해 김창식고 한석진은 거의 사경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896년에는 홀의 순직과 그의 미망인 로제타 홀이 미국으로 돌아가고 그 후임자인 노블 선교사 부부가 평양에 임명받아 오자 그들과 함께 평양과 이북지역의 복음 전파에 힘썼다. 그는 그해부터 신학반에 들어가서 4년 과정의 목회자 수업을 받았다.
1899년에는 삼화 골로 파송받아 평양 밖 지역까지 전도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전도 사역을 한지 17년 만인 1901년5월 14일 한성 상동교회에서 개최된 제 17회 미국감리회 조선 선교연회에서 스크렌턴 감독의 집례로 한국 최초의 목사로 임명받았다. 참고로 장로교에서는 1907년 9월에 7인의 조선인 목사가 안수 되었다.
그는 목사 안수를 받고 바로 그의 고향인 황해도로 돌아가 1년간 사역을 하였고 1904년에는 한국인 최초 지방감리사로 임명받아 이북 지역 순회목사로 5년간 전도 사역을 하였다. 그후에도 근 이남 지역인 경기도 안산과 수원지역의 순회 사역을 하였다. 이어서 1921년부터 1924년까지 67세로 정년 은퇴하기 까지는 황해도 해주지방 순회 목사로 활약하였다.
은퇴 후에는 그의 아들 김영진이 자신이 섬겼던 제임스 홀의 아들인 셔워드 홀이 황해도 해주에서 결핵 요양소에서 일 할 때에 그곳에서 함께 의료 사역을 함으로 그 아들도 아버지의 대를 이어 의료 사역에 헌신하였다. 그는 25년 동안 전국을 다니며 125개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는 선교사들로부터 '한국의 사도바울'이라고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