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영역, 신적 섭리 비틀고 조작해 만들어
크든 작든, 하나님 창조질서 어긋날 수 밖에
실상 회피하고 거짓과 환상 좇는 문화 세태
성경, 자연과 영혼의 실상 냉정하게 밝혀내
복제지향 문화 속 현실 도피와 자기 신격화

◈가상과 복제: 한계 극복을 위해 복제되고 조작된 가상현실

<매트릭스: 리저렉션>의 서사는 시리즈를 이어가기 위해 전편의 결말에서 죽는 것으로 확정된 두 주인공 네오(키아누 리브스 분)와 트리니티(캐리앤 모스)를 되살려 놓는다.

근거가 빈약한 이 부활 서사를 가능케 하는 수단은 가상현실이다. <매트릭스> 트릴로지와 마찬가지로 두 사람의 실제 몸은 캡슐형 튜브 안에 갇혔고, 정신은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작동하는 가상세계 안에 구속되어 있다.

<매트릭스: 리저렉션>의 서사는 현실을 그럴듯하게 재현하는 시뮬레이션 기술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문화조류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이전 <매트릭스> 트릴로지에서도 현실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 가상현실이 주된 소재였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매트릭스>에서 가상세계는 다분히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공간이었다.

이번 <매트릭스: 리저렉션>도 정신의 감옥이라는 매트릭스의 부정적 역할을 강조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의 한계를 극복하고 스스로를 신격화할 기회를 되찾는 경로로서의 역할 또한 부각시키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번째 기회를 줘서 고맙다"고 한 트리니티의 대사는 가상현실이 현실을 도피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아예 초월하도록 해주는 수단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실을 그럴듯하게, 그리고 무한하게 복제하는 것은 오늘날 대중문화의 지향점으로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는 다양한 학문적·사상적·문화적 배경이 반영되어 있다.

효율적 대량생산을 기반삼는 근현대 자본주의 경제질서,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실험이 대변하는 양자중첩 이론, 여기에 빅뱅 이론이 종합된 다중우주 이론,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와 '마릴린 먼로'로 대표되는 복제의 미적 감성, 그리고 시뮬레이션을 통해 현실을 재현하는 컴퓨터 공학까지, 이 모든 요소들이 오늘날 대중문화가 지향하는 복제의 이상을 낳는 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복제지향의 문화조류는 <매트릭스: 리저렉션>은 물론이고, 얼마 전 개봉한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멀티버스라는 설정을 통해 현실과 거의 흡사한 다중우주를 넘나드는 슈퍼히어로들의 활극을 그려내고 있다.

이 멀티버스 설정은 기존 히어로 및 빌런 캐릭터들을 상업적으로 재탕해 활용하기 위한 조잡한 서사적 장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관객들이 거기에 빠져드는 이유는 이렇게 다중으로 복제된 세계들이 현실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각종 초월적 체험들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멀티버스 덕분에 시간의 역행, 또 다른 자아(alter ego)와의 만남, 그리고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최근의 대중문화가 가상세계나 다중우주에 매혹된 인간 군상을 자주 그려내는 이유를 자세히 파헤치면, 종국에는 인간에게 허락된 삶이 단 한 번뿐이라는 엄정한 현실인식에 대한 반감과 두려움이 발견된다.

매트릭스 리저렉션
▲스파이더맨 캐릭터 셋이 한꺼번에 출현하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가상을 통한 현실초월의 꿈을 반영한다.

◈가상과 욕망: 한 번 살고 죽는 엄정한 현실에 대한 두려움

성경은 죽음 이후 영혼의 영원한 앞날이 몇십 년에 불과한 이 짧은 생애의 행실로 결정된다고 가르친다. 현대 실존철학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달리 죽음 이후 영혼의 존속을 절대 인정하지 않지만, 삶이 단 한 번 주어지는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에 그 가치와 의미를 진지하게 되새기며 살아나가야 한다고 권고한다.

그러나 오늘날 대중문화는 이렇게 삶의 유일회성을 강조하는 가르침들을 거부한다.

인생이 단 한 번 주어지는 유일한 기회라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삶의 가능성이 폭좁게 제한되어 있다는 뜻으로도 새겨질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의 자유와 삶의 가능성 영역이 매우 협소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면, 누구든 자기 삶을 진지하게 대할 수밖에 없다. 이런 진지함은 자기 존재의 가치를 드높이려는 노력으로 이어져, 타인에 대한 봉사와 헌신, 진리에 대한 탐구, 보다 고결한 존재를 향한 갈망 등의 양태로 우리 삶을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이렇게 삶을 진지하고 고결하게 만들려는 노력은 가상에 천착하거나 유희나 방탕에 빠져드는 일을 방지한다. 그리고 항상 삶을 가치있게 바꾸어가려는 열의와 긴장감을 유발한다.

그런데 이런 삶의 태도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있어서는 대단히 불리하게 작용한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치열한 경쟁 속 긴장감 어린 일상으로부터 일탈 계기를 제공하고서, 그 대가로 경제적 이익을 얻는다.

그런데 만일 사람들이 성경의 가르침이나 오늘날 실존철학이 권고하는 것처럼 죽음을 기억하려 애쓰고, 그로부터 삶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로 살아가려 하면 할수록,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쇠퇴할 수밖에 없다. 현실에 대한 책임감이 가상이 주는 매력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매트릭스 리저렉션
▲<매트릭스> 시리즈의 단골 소재, 현실로 돌아가게 해주는 빨간 약.

오늘날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쏟아내는 콘텐츠들은 예술의 영역 가운데서도 가장 가소적(plastic)인 형태로 말초적인 흥취를 자극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

자기 삶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찰하고 일구지 않는 이들이 이런 콘텐츠에 깊게 빠져든다. 이는 현실에 대한 진지한 자각을 회피하는 이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중문화 콘텐츠들이 갈수록 더 중시하는 가상과 복제의 문화 조류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실존적 가능성이 거짓된 방식으로나마 확장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런 메시지는 기독교 신앙에 위배된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믿음을 갖고 실천하기 위해 허락된 시공간 영역은 모든 인간이 함께 공유하는 단 하나의 물리적 현실뿐이다. 그 현실을 여러 양태로 복제한 가상의 영역들은 온전한 신앙의 공간으로 인정될 수 없다.

인간이 창조해 낸 이런 가상의 영역들은 하나님께서 만물에 대해 정하신 신적 섭리를 이리저리 비틀어 조작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크든 작든 하나님의 창조질서와는 어긋난 특성들을 갖게 된다.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가 가상 공간 속에서 하늘을 날고, 발사된 총탄을 멈추며, 복잡한 지식을 불과 몇 초 만에 학습하는 장면들은 모두 삶의 가능성을 인간의 욕망에 따라 허위로 극대화한 사례이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 주인공 피터 파커(톰 홀랜드 분)가 다른 평행우주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자아를 만나 도움과 위로를 얻는 상황 역시, 현실을 지배하는 신적 창조질서를 기괴하게 비틀어 뛰어넘는 행태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고대에는 이방 종교의 신화들이 이 가상으로 복제된 세계의 원형을 제공했다. 특히 초대교회 당시 로마 제국 각지에 널리 퍼졌던 영지주의 사상은 현실에서 충족될 수 없는 이상들이 집약된 관념적 가상세계에 대한 서구적 모범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중기 플라톤주의와 깊게 연결된 이 영지주의 사상은 이내 교회 내부로 침투해 기독교 영지주의 이단으로 발전되었다. 당시 영지주의의 악영향이 워낙 컸던 탓에 사도 바울이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라(딤전 4:7)"고 권고할 정도였다.

오늘날에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기술의 등장에 힘입어 알고리즘과 감각의 조작을 통해 복제된 가상현실이 현실 초월의 쾌감을 선사하는 방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매트릭스> 트릴로지는 가상현실이 가진 이러한 매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려 영화계 역사에 길이 남는 작품이 되었다.

원래 <매트릭스> 트릴로지가 이렇게까지 큰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가상현실이 선사하는 쾌락과 만족감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현실로 돌아와 인류의 생존과 구원을 위해 분투하는 영웅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8년 만에 개봉한 <매트릭스> 신작의 서사는 현실을 지켜내려던 전작의 서사와 방향을 달리해 현실과 가상의 불가피한 공존을 정당화한다.

매트릭스 리저렉션
▲새로운 가상현실 속에 갇힌 주인공 네오.

이는 현실의 고단함보다 가상이 주는 안락함을 더 사랑하고 가상에 빠져 한계를 초월해 보려는 현실도피의 문화 세태를 반영한다.

최근 유망한 미래기술로 각광받고 있는 VR, AR, 메타버스, BCI(brain-computer interface, 뇌-컴퓨터 소통) 모두가 궁극적으로는 자연적 창조질서를 벗어나 인간이 조작 가능한 새로운 세계질서를 정립하고자 하는 자기신격화 욕망의 발로로 이해될 수 있다.

<매트릭스: 리저렉션> 역시 점차 가상에 침잠되어가는 인류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문화적 사례로 채택될 수 있다.

이처럼 실상을 회피하고 거짓과 환상을 좇는 데 익숙해진 문화세태 속에서 성경의 가르침은 환영받지 못한다.

성경은 자연과 영혼의 실상을 지극히 냉정하고 예리하게 드러내어 밝히는 가르침을 전하는데, 가상의 안락함에 길들여진 세대는 자연과 영혼의 냉혹하고 엄정한 현실에 큰 부담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박욱주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