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조선을 1910년에 강제 합방함으로 그 당시 조선인들은 국적상으로는 일본인이 되어 일본에서 학업과 생업과 이주가 자유스러운 관계로 수십만 명의 조선인들이 1945년 해방되기 전까지 일본에 건너와 거류하였다. 그러한 역사적 관계로 조선인들이 일본에서의 신앙생활에는 신사참배의 강요가 있기 전까지는 신앙생활과 교회 사역 활동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러한 관계로 일본에 유학하고 있는 신 지식인층이라고 할 수 있는 많은 유학생들은 조선인들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고 그들 중에는 유학중에 타종교에서 기독교인으로 개종하거나 처음 기독교인이 된 경우도 많았다. 또 취업차 공장에서 일하는 조선인들 중에도 기독교인들이 있었기에 이들에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할 필요도 있었고 어떤 곳에서는 조선의 사역자를 필요로 하여 본국 총회 선교부에 요청을 하기도 하였다.
조선 예수교장로교에서는 1907년 평양 독노회가 결성되어 선교사 파송 결정이 이 노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 당시 이미 일본 동경을 위시한 중요 도시의 여러 대학에 유학중인 학생들이 많았기에 기독청년들이 YMCA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이 조선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함에 따라 1909년 제 3회 조선 장로교 독노회에서는 한석진 목사를 3개월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1909년10월에는 한석진 목사는 그곳의 유학생인 김정식, 조만식, 오순형, 영루로, 백나훈, 장원요, 장혜순, 김현수를 집사로 임명하고 교회를 설립한 후 3개월 뒤에 귀국하였다.
1912년에는 장로회 총회가 결성되어 유학생뿐만 아니라 일본에 거주하는 일반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선교 사역을 하도록 임종순 목사를 파송하였다. 도쿄유학생 500여 명 중에 100여명이 임종순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에 출석하였고, 30여명의 일반인들과 공장에서 일하는 조선인 여공들을 위한 전도도 병행하였다. 한편 고베신학교에 유학중인 정덕생 목사는 총회의 재정 지원을 받으며 믿지 않는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전도 활동을 하였다. 그 외에도 고베신학교에 유학중인 김영규, 양태승, 박상동, 김병우, 전필순도 일본 선교를 지원하며 도쿄, 오사카, 고베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활발히 선교하였다.
조선의 장로교와 감리교는 일본의 선교사역이 확장됨에 따라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장로교가 처음 시작한 일본 선교를 연합사업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장로교와 감리교가 각 3인씩 6인으로 위원회를 구성하고 선교비도 동일하게 분담하기로 하였다. 장로교가 주도하던 일본선교를 인계받은 장.감연합공회는 1912년 주공삼 목사를 파송하면서 새로운 협력시대를 열었다. 처음에는 도쿄를 중심으로 시작된 일본선교는 곧 칸사이, 큐슈, 세 지방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이렇게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파송한 여러 선교사들이 계속 계승하면서 해방까지 지속되었다. 9년을 지속하여 사역한 김치선을 제외하고는 모두 2년이나 3년의 단기 선교사역을 하였지만 장로교와 감리교가 합하여 선교사역을 하였다는 점은 한국 교회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현합사역이었고 좋은 모델이 되었다.
이 외에도 연합으로 파송한 여러 명의 선교사들이 일본에서 역하였다. 1922년에는 장로교 총회에서 김이곤 목사를 고베에, 1924년에는 박연서 목사를 오사카에 파견하여 관서지방 선교를 시작하였다.
1927년에는 캐나다 선교에서 탈퇴한 영재형 목사가 고베, 나고야, 교토, 나라 등의 대도시에 조선인교회가 설립되었고, 선교구도 1931년 총회록이 밝히는 일본의 교세는 장로교 목사와 전도사가 17명, 전체교인 2,416명, 교회 46개, 세례교인 826명, 19개 YMCA 회원 540명, 유치원 5개, 학생 119명, 부인회 14개의 280명 회원이었다.
이러한 일본선교의 결과 세워진 일본 내의 교회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에게 나라를 잃은 조선동포들에게 민족정신을 함양하며 신앙으로 민족공동체를 이루어 정신적으로 저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하였다. 특히 유학생들 중에는 조만식과 같이 해방 후에 인재가 되어 돌아와 건국 사업에 공헌하였고 조국의 근대화에 기여하였으며 특히 일본의 고베신학을 공부하고 온 저들은 해방 후 교회 부흥과 신학에 헌신하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