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술

언젠가 필자는 전직 대통령이나 현재 대통령 후보자들 중에서 미래에 대통령이 되는 것에 대한 예언을 한 종교인에 의한 현몽 해석이나 역술인 혹은 도인 등을 통해 들었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오래 전부터 우리 사회엔 청년층과 식자층 할 것 없이 심지어 기독교인들도 중요한 일을 앞두고 점을 보러 다니고 배우자를 고르기 위해 궁합을 보는 것이 암암리에 성행해 온 편이었는데, 요즘엔 '타로' 간판마저 버젓하게 대학가에 즐비한 것이 이채롭다.

사람들이 일신상 문제에 대한 예언이나 점에 습관적인 관심을 두는 것은 앞날에 대한 호기심과 자기 인생의 길흉화복을 미리 컨트롤하고 싶은 마음에서일 것이다. 결국 복을 바라고 환난을 피해가고 싶은 바람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 우리가 살아오면서 직간접 경험한 바에 의하면 점이란 일견 맞는 것도 같고 숫제 안맞는 것도 같고 동일인에 대해서도 점치는 사람의 의견이 분분하고 극명하게 대조적인 경우가 다반사다.

운세와 점은 주역의 수리철학과 사주명리학과 무속의 영에 근거하는데, 이것의 불확실성을 웅변이라도 하듯 이렇게 다양한 결과를 가져오는 이유는 해석이 저마다 다르고 즉흥적인 무속의 영, 즉 귀신의 힘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봐도 그만 안봐도 그만, 살아감에 있어 실제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다는 점에서 점의 효력이란 그저 단순히 불안심리를 임기응변적으로 잠재우는 것뿐이다. 아니, 그보다 오히려 헛된 것에 습관적으로 기대게 함으로써 이성을 둔화시키고 미망만 키우는 해악을 가져다 준다.

점술의 성격

가장 대중적인 사주명리학은 고대 중국인의 자연철학적 사유방식을 차용해 운명을 추론하는 쪽으로 개발된 것이라 한다. 즉 자연의 이치를 음양오행 이론으로 정립한 것을 기초로, 개인이 태어난 날짜와 시간에 따라 타고난 운명을 점치는 것으로 다분히 운명론적인 성격을 지닌다.

불교나 천부경, 주역, 성리학, 도교 등의 이론에도 모두 현상계의 자연법칙으로부터 만물을 다스리는 원리들을 고안하여 인간의 삶에 대입함으로써, 운명론적으로 규정한 것들이 들어있으므로 사주 명리학과 사촌지간이다.

비록 신(神)에 대한 인식이 달라도 보편적 이성을 지닌 인류가 공통의 자연환경에 보편적 진선미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동양의 경전이나 철학적 가르침이 일견 성경의 교훈과 유사성이 있는 듯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들이 생각하는 신(神)이란 생성·소멸하는 만물 속에 깃들어 있는 추상적 법칙이나 에너지이므로, 이들의 신(神)이나 깨달음의 기록인 경전 또한 부단히 변화해가는 과정에 있다고 저들은 말한다.

즉 피조세계 운행의 원리를 따라 가면서 그 안에 추상적인 제1의 원리를 잡으려 자꾸 애를 쓰다 보니, 저들의 세계관은 과학의 발전과 함께 과정적 형이상학의 모습으로 계속 진화해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혹자는 성경은 하나지만 불교의 경전은 깨닫는 누구나 기록할 수 있으므로 무수하다고 자랑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저들의 표현대로 저들의 신(神)은 형용사나 동사로만 존재하지, 확고한 부동의 고유 명사적 실체로서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유학이나 노장철학이나 불교를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나 사상이라 간주해도 인간의 사후 세계에 관해 논하고 조상의 혼을 다루는 이상 저들 속의 고유한 종교성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동양 사상 속에 '(귀)신'이란 이름으로 움직이는 어떤 기운이나 영은 서로 아주 친숙하고 유사한 성질을 띄고 있다는 것에 우리는 각별히 유념할 필요가 있다.

성경적 예언의 성격

성경의 예언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에게 우주만물의 창조주이며 주관자인 하나님께서 직접 내리신 명령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세기 2:11)".

최초로 선포된 성경의 예언을 보면, 이미 타고난 운명에 의해 이렇게 될 것이라는 역술적인 내용과는 근본 성격이 다르다.

성경의 예언은 욥과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구체적인 명령과 지침이 주어진 상황에서 인간이 자유의지를 통해 스스로 선택의 결정을 내림으로써 초래한 결과로 이뤄진다.

성경의 예언은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신 경우도 있었지만, 신자가 먼저 하나님께 뜻을 물어 하나님의 대답을 듣고 지침대로 행함으로써 예언의 성취를 증거하는 전체 과정에서 성립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성경상 예언의 차원은 역술처럼 개인적 길흉화복이나 이벤트성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개인적 예언이라도 창조자의 전 지구적 구속사-구원 계획과 맞물려 있다는 데 실로 심대한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선 최초의 명령적 지침을 어김으로써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를 부르셔서, 사탄 포함 3자에게 저들이 스스로 초래한 결과를 예언적으로 말씀하셨다. 이 예언적 말씀엔 향후 인간들의 삶의 여정에 미칠 하나님의 주권적 영향력과 적극적인 개입이 포괄적으로 시사됐다(창 3:14-24).

이 내용은 인간의 영육간 죽음과 삶의 고통, 악한 세력과의 전쟁과 주님의 초림, 그리고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통한 인류 구원의 완성을 함의한다.

그 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예언은 언약의 말씀으로서 외견상 개별적 인간을 선택적으로 부르시는 방법으로 시작되어, 점차 민족적, 세계적, 전 우주적 구원 역사의 서사로 전개되고 계시되었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의 하이라이트는 구약 시대에 걸쳐 여일하게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해 오신 초림의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며, 신약 시대의 도래와 최종적으로 완전 계시인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예언으로 완성되었다.

부적의 효력

필자는 얼마 전 TV 토론에서 야당 후보의 과거 '손바닥 왕(王) 자' 논란에 대해 여야를 막론한 정객들이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대통령 후보자로서 자질 문제를 성토하는 걸 들었다.

말하자면 이성적인 판단 대신 무속에 의존하는 것에 대한 경계와 더불어, 부인이 운세를 주제로 학위논문을 쓴 사실을 전직 대통령에 관한 무속 스캔들과 연계하여 상당히 우려하는 투였다.

그러나 필자는 그런 공격을 하는 정객들의 종교 또한 점이나 운세와 친화적인 성격이라는 데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적(符籍)은 전통 무속의 상징물로 보통 승려나 역술인과 무속인, 도사가 만든 것이 더 효험이 있다고 하는데, 굿처럼 액땜의 효과로 사용한다. 액땜이란 미리 작은 나쁜 일을 겪음으로써 큰 나쁜 일을 예방한다는 뜻이다.

이를 생각해 보면 화(禍)를 가져오는 작은 귀신으로부터 해를 입음으로써 큰 귀신의 해를 막는다는 뜻이니, 부적의 효과라야 고작 좀 덜한 해를 받겠다는 함의를 지닌 셈이다.

이 논리를 성경의 영적 의미로 해석해 보면 참으로 부조리하다. 예수께서 귀신을 내쫓는 사역을 행하셨을 때, 그를 시기하고 모함하려는 자들이 예수가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공박하였다.

그때 예수께선 "자기들끼리 분쟁하는 집이나 나라마다 서지 못하고 무너지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만일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사탄 나라에 내분이 일어나는 것이니 어떻게 사탄의 나라가 서겠느냐(눅 11:14-20)"고 반문하셨다.

즉 예수께선 귀신의 왕과 대적관계에 있는 입장에서 '귀신의 왕'의 힘이 아닌 다른 힘인 '하나님의 힘' 즉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 것을 분명히 밝히신 것이다(마12:28-29).

예수께서 귀신을 내쫓으신 힘의 원천은 친히 하나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권세를 위임받아 만물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하시는 전능자의 능력에 있었지, 하나님께 대적하여 에덴동산에서 영원한 멸망을 선고받은 사탄 마귀의 힘과는 무관한 것이었다(마 28:18, 빌 2:10, 창 3:15, 계 20:10).

오늘날 예수의 권세를 위임받은 모든 크리스천들도 예수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똑같은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요 14:12, 막 16:17).

그러나 부적은 귀신을 힘입어 귀신을 쫓는 격이다. 말하자면 큰 귀신이 아닌 졸개 귀신을 힘입는 것이므로, 내분이 일어나도 졸개만 망할 뿐 큰 귀신은 건재한 셈이다. 따라서 날이 갈수록 귀신이 끼치는 해의 정도는 점점 더 커질 것이고, 종국엔 큰 귀신의 해를 맞을 수밖에 없는 형국이 도래할 것이다.

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상황인가? 그러므로 액땜에 끌어들인 졸개 귀신은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는 것이고, 귀신이 들어오는 통로만 열어준 격이다.

요컨대 부적의 효과가 졸개 귀신과의 동거성 합의인데 반해, 기독교의 축사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원천적으로 내쫓는 것이다. 당신은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기독교인들이 점을 보러 다닌다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은 탓에 영적인 분별력이 없기 때문이다(레 20:6).

영적 실체

대선 정국인 요즘 등장한 또 다른 아이러니는 주역에 나오는 비정리법권천(非精理法權天)이나 비용지덕운천(非勇智德運天) 등의 표현이 종종 회자되는 현상이다. 이 뜻은 권력엔 운이 따라줘야 하는데, 그 운도 하늘의 뜻 혹은 민심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운'이란 '점'보단 비격식적인 것으로 자신의 의지나 노력과는 무관하게 발생하는 긍정적 혹은 부정적 환경을 뜻하는데, 그래도 좋은 뜻을 품으면 하늘의 뜻을 역전시켜 행운이 따른다고도 한다. 물론 여기서 '하늘'은 전술한 바와 같이 실체없는 추상적 개념이다.

성경을 읽어 진리의 말씀을 알고 영적 분별의 은사를 받은 신자라면, 사실 위에 열거한 사례들이 본질상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대동소이한 내용들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주역이나 동양 종교, 동양 철학에 조예가 있는 분들껜 대단히 조심스런 말씀이지만, 성경은 이 세상을 다스리는 영적 실체를 '이 세상 임금(요 16:11)'이요,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엡 6:12)'로 밝히 말씀하고 있다. 이는 다른 이름으로 '미혹의 영(요일 4:6), 사탄, 마귀, 귀신'이라 일컬어진다.

이들 영적 존재들은 하나님의 일에 대해 오히려 육체적 한계를 지닌 우리 인간들보다 더 소상히 잘 알고 있고 지혜와 능력을 지닌 영적 실체이다.

"어느 날 천사들이 여호와 앞에 나와 섰을 때 고소자인 사탄도 그들 가운데 와 있었다(욥 1:6)".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막 3:11)".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행 19:15)".

그러므로 이 귀신들은 얼마든지 불의한 목적을 위해 과거를 맞히는 척 하거나 미래를 알려주는 척 할 수 있다. 구약의 사울왕의 예를보자. 그는 하나님의 지침적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대신에 자신의 상황 판단에 따라 자의로 행동하길 좋아했던 대가로, 결국 하나님께로 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다(삼상 15:26).

그 후 하나님과의 소통이 끊어진 사울이 극도로 불안한 심경에서, 대사를 앞두고 신접한 자를 찾아가 들은 예언의 내용은 용하게도(?)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그런 사울의 결국은 자결이었다.

그가 만일 히스기야 왕이나 아합 왕 처럼 선지자를 통한 죽음이나 재앙의 예언을 받고도 다른 태도를 취했다면, 그의 결국은 다른 모양이었을른지 모른다.

히스기야의 진심어린 통곡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선 그의 기도의 눈물을 보시고 십오년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다(왕하 20:5-6). 또 이방신을 섬기며 오만하고 포악한 아내 이세벨의 충동으로 전무후무한 악행을 저질렀던 아합왕에게 재앙을 선고하셨던 하나님은 그의 금식기도와 근신과 겸비함을 보시고 재앙을 유보하셨다(왕상 21).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예언의 성격은 요즘 인기 있다는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에 나오는 내용처럼 저주스런 공포심 조장이나 위협적인 폭력성과는 거리가 멀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은 무작위한 순간적 돌발 상황에서 극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완전 계시인 성경이며, 또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 말씀이나 기도, 혹은 꿈을 통해 전해지는 매우 예감적이고 감화적인 영적 메시지이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예언의 성격과 목적은 자비와 연민에 기반하여 죄인을 돌이키고 하나님께로 나아오도록 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한 뜨거운 사랑에서 비롯된 열정적 구애의 완성인 구원에 있다.

반면 귀신들의 예언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모르거나 알고도 믿음이 약해 불안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지 못하게 만들어, 대신 귀신들을 의지하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그리고 귀신들의 궁극적 목적은 성경에 명확히 나와있는 대로 한결같이 인간을 영원히 파멸케 하는데 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누구든 점이나 운세를 보기 위해 신접한 사람들을 자꾸 찾아가면, 이들 상담자들은 '귀신'과 농밀하고 내밀한 관계를 가지는 전문가들이므로, 이들을 매개로 귀신들이 얼마든지 내담자들을 기만하고 현혹할 뿐 아니라 내담자의 삶속에 개입하도록 끌어들이는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어 심각한 경종을 울릴 만하다.

요컨대 귀신들에게 예언을 들으려는 것은 타락한 천사의 졸개인 귀신의 장난에 속아 넘어가는 행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그 머리가 이미 산산조각 나서 영원한 저주와 멸망만을 기다리고 있는 귀신들의 간교한 장난에 말이다.

또 무엇보다 귀신들과 접촉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음란한 행위와 같다는 것에 특히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레 20:6)".

이처럼 영적인 음란은 육적인 음란과 비견되는 것이므로, 이방 신과 무속이 성행하는 국가 사회에 음란한 문화나 음란한 루머나 음란한 욕설들이 만연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런 귀결인지도 모른다.

맺음말

필자는 언젠가 신학교에 적을 둔 신분으로 동양 철학에 심취하여 기독교의 본질을 노골적으로 훼손하길 주저하지 않아온 한 유명 인사가 강의 중에 스스로 고백했던 내용이 아직도 생각난다.

내용인즉, 강의자가 밤에 취침 중 꿈 속에서 악귀의 대단한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몽사몽간 벌떡 일어나 귀신을 물리치려 고함을 치며 저항하다 그만 미끄러져 방바닥 모서리에 정수리를 부딪히게 되었는데, 몹시 큰 출혈이 일어나 매우 위급한 고비를 겪었다는 것이다.

전술한바 반지성적으로 보이는 무속에 역사하는 영이나 지성적으로 보이는 동양 경전에 역사하는 영이나 근본은 아주 유사한 것이다.

위 강의자가 만약 성경 말씀을 제대로 읽고 이해했다면 그런 불상사를 겪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에, 필자는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성경의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계시고 실체가 확연하신 분으로서 우리와 소통하길 고대하시며, 우리 삶의 정황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시고 도우시는 사랑과 생명의 하나님이시다.

영원한 다윗 왕조를 다윗에게 약속하신 하나님께선 솔로몬의 죄악으로 인해 나라를 둘로 쪼개시는 결단을 감행하셨다.

그러나 다윗 왕조의 영속성에 대한 언약의 큰 그림은 폐기치 않으시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전 지구적이고 우주적인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을 온전히 도래케 하셨다.

인류사의 큰 그림을 완성해 나가시는 전능자의 능력과 파워는 이처럼 위대하고 강력하다.

이제 전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는 시대에 일국을 다스리는 권한을 하늘로부터 위임받은 대통령이라면, 통치와 권세와 능력의 원천 되시는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알고 깨달아야 한다.

그럴 때 이 세상과 미래 세상을 포함한 전 세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어긋나지 않게 성심껏 나라를 치리할 수 있는 국정의 지혜를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부디 이 땅에 머무는 동안 피차 아름다운 수고의 열매를 맺어, 이 세상의 삶이 끝난 후에도 천국 도성으로 입성할 수 있는 복된 대통령과 국민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기도하는 마음이다.

박현숙
▲박현숙 목사.

박현숙 목사
인터넷 선교 사역자
리빙지저스, 박현숙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9awEs_qm4YouqDs9a_zCUg
서울대 수료 후 뉴욕 나약신학교와 미주 장신대원을 졸업했다. 미주에서 크리스천 한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해 왔다.
시집으로 <너의 밤은 나에게 낯설지 않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