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5.18의 기억
1980년 5월 어느 날, 새벽 6시경 연건동 대학 한 종교 서클 룸에서 혼자 남아 깜빡 잠이 들었던 이십대초의 필자는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화뜰짝 눈을 떴다.
갑자기 무장한 한 군인이 안으로 불쑥 들어오더니,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는 내게 밤새 혼자 서클룸에 남아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다. 난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잠이 든것 같다고 얼버무리고, 기숙사엘 들어가겠다고 말하고 서둘러 서클룸을 나왔다.
바깥엔 검은 삼각 베레모를 쓰고 살벌하게 무장한 군인들이 캠퍼스에 깔려 있는 진풍경이 벌어져,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완전히 뒤바뀐 것 같았다. 폭풍 전의 고요랄까, 미심쩍은 불안한 공기가 적요함 속에 팽배한 가운데 감지되는 살벌한 긴장감, 바로 그것이었다.
말하자면 당시 난 연일 데모대에 참가하긴 했어도, 시국의 정치적 상황 보단 자신의 존재 상황의 문제에 치여 지독한 병을 앓고 있는 중이었는데, 우연찮게도 5.17 비상계엄 조치가 내려진 5.18 첫 아침의 목격자가 된 셈이었다.
서둘러 기숙사엘 들어온 난, 어쩐지 불안한 기분이 들어 룸메이트에게 혹 군인이 와서 날 찾으면 모른다고 하라고 부탁하고 탈출하듯 다급히 캠퍼스 뒷문 쪽으로 빠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그즈음 연일 전두환(현수막에 '앞 전(前), 머리 두(頭), 칼 환(鋎)을 표기했다)과 신현확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가두 시위가 전국에서 모여든 십만 명의 서울역 집결로 절정에 달한데다, 해산 후에도 각 대학 캠퍼스내에서 연좌 데모를 벌이던 상황이었다.
이튿날 필자는 룸메이트로부터 내가 기숙사를 떠나자마자 계엄군이 찾으러 와서는 기숙사를 수색했다는 전언을 받고, 실로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그 며칠 후 흥사단 서클의 한 친구는 여학생인데도 광화문 지하도를 걸어가던 중 무작위로 휘두른 계엄군의 곤봉에 맞아 머리를 꿰매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나 학림에 모인 흥사단 친구들은 비밀스레 당시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악할 만한 뉴스들을 외신 보도와 사진들을 통해 서로 알리기 시작했다. 필자는 듣고도 보고도 실로 충격으로 얼떨떨 하기만 했다.
2. 인격 살인적 유튜브 방송
평소 같으면 생각하고 싶지 않은 그 어두운 시절을 필자가 새삼 떠올리는 이유는 근자에 연신 뉴스에 회자되는, 야당 대통령 후보의 소위 '전두환 실언' 건 때문일 것이다. 올 봄이 되어서야, 갑자기 필자에겐 그 후보의 이름이 낯선 이름이 아니라는 자각이 불현듯 들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때 써클 룸 사건이 있던 한 주 전쯤 필자는 관악의 학생회관을 갔었다. 근데 그날 따라 학생회관 이층 홀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리 유독 센세이셔널했다. 일군의 학생들이 비상사태가 벌어진 것처럼 쿵쾅거리며 우르르 몰려가고 몰려오는 것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그 가운데 여기저기서 비밀스레 속보를 알리는 호외처럼 들려오는 이름 석 자가 있었는데, '윤석열'이란 이름이었다. 그가 모의재판에서 '전두환'에게 사형을 구형했다는 뉴스였다. 어쩌면 사형이 아니라 무기징역이었다 하더라도, 당시 분위기상 사형에 버금가는 충격으로 들렸던 것이다.
그 즈음 학생들은 12.12 사태 이후 정치적 실세로 등장한 신군부에 의해 짓밟힐지 모르는 민주화의 꿈에 대한 암울한 전조를 그런 식으로 본능적으로 예감하고 불안감이 팽배해 있던 분위기였다.
아크로폴리스 광장엔 사복 경찰의 감시를 피해 연일 학생들이 산발적으로 운집하여 신군부 세력을 규탄하는 외침이 울려퍼져, 대부분의 학생들을 강의실과 도서관에서 몰아내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윤석열의 모의재판 구형에 대해 극도로 흥분되어 있었고 숨을 죽이며 긴장하면서 쉬쉬 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날, 필자가 윤 후보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TV에서 본 그에 대한 첫 인상은 한마디로 '강직한 의로움' 같은 느낌을 받았다. 거기다 그가 내건 슬로건이 상식과 공정이란 것도 공감이 가는 터였다.
상식(常識, common sense)의 정의는 "사회의 구성원이 공유하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 일반적인 견문, 이해력, 판단력, 사리분별(위키백과)"이다. 그러므로 상식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잘못된 상식은 다분히 고쳐져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 동안 세계적인 추세에 발맞춰 '양성 이슈'에 대한 상식은 한국에서도 상당한 변화를 겪어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 사회 안엔 병폐적인 인습이 복병처럼 숨어있다가 사회 전반을 독버섯처럼 휩쓰는 예가 적지 않은 현실이다.
그 한 예로 필자가 며칠 전에 비로소 알게 된, 올 여름에 제작된 윤 후보의 부인에 대한 인격살인적 유튜브 방송을 들 수 있다. 모 유튜브 채널은 정체불명의 한 남자의 얼굴을 가리고 음성조차 변조하여, 윤 후보의 부인에 대해 극히 사적인 느낌과 짐작에 의존하여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내게 했고 이를 그대로 방송하였다.
이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당사자들 또한 거리낌없이 자신들의 알량한 취재에 시원챦은 풍문을 섞은 것을 자료삼아, 소설을 써내려가듯 윤 후보 부인을 타깃으로 대담을 진행하는 것을 꾸준히 방송해 왔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백만 단위의 조회수를 비롯, 그들의 기대 이상의 소위 '쥴리 벽화'를 낳게하는 쾌거(?)까지 이뤄냈다.
그리고 그 '쥴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윤 후보의 정적인 한 여성 고관의 입을 통해 다시금 전 국민 앞에서 그 위상을 공고케 하는 효력을 발휘했다.
3. 표현의 자유보다 우선인 인간의 존엄권
그러면 이제 일련의 사건들을 보아온 한국 사회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무엇인가?
법제적으로 어떤 이에 대한 사생활을 공개적으로 고발하고 보도하려면, 사회적 공리를 위한 명분이 뚜렷해야 한다. 그리고 성폭행 피해자가 아니라면 고발자의 신상도 반드시 공개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면 대통령 부인에 대한 과거 사생활 스토킹이 과연 공익에 해당되는 사안인지 먼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세계 각국 대통령 후보 부인의 자격에 대한 어떤 헌법이나 원칙이나 암묵적 기준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내조자로서 좋은 품성에 대한 기대가 국민들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비 퍼스트레이디의 존재는 부부라는 고유한 특성상, 일정 부분 대통령과는 다를 수 밖에 없는 영역이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공익적 평가는 남편의 취임 후부터 적용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물론 수면 위로 드러난 어떤 불법적인 문제가 있다면 불가피하게 검증 절차를 통과하게 되겠지만, 문제는 후보 부인의 지난 사생활에 대한 과도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무례한 억측의 무모한 유포인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의 경우, 헌법이나 원리, 원칙, 제도 등에서 기본권이 명시되어 있지 않은 경우엔 헌법 제10조 또는 제37조 1항에 의해 도출된다고 나와 있다(위키백과).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이로 보건대, 언론이 보장을 위해 힘쓰는 '국민의 알 권리'란 것도 기본적 인격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행해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기자협회의 인권보도준칙엔 취재 과정에서 인격권 침해와 개인정보 유출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유튜버들이 소설을 쓰듯 불온한 상상력을 제멋대로 발휘하여 유포함으로써 민도를 겉잡을 수 없이 하락시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 않은가?
성향적으로 생각해볼 때 '쥴리 망동'은 정치성을 띈 악의와 음모 외에도 한국의 개념 없는 일부 남성군(群)들이 전통적으로 남성 위주 사회의 잔재인 여성성에 대한 맹목적 환상을 '국모'니 '영부인'이니 일컫는 대상에 투영하다 못해, 신경증적으로 그녀의 과거사를 스토킹하고선 마치 이를 무슨 공익을 위한 것이라도 되는 양 둔갑시켜 발생한 일이다.
타인의 과거를 스토킹함으로써 개인의 존엄성과 가치를 마구 훼손하고 유린하는 것은 헌법이 명시한 천부적인 기본적 인권에 위해를 가하는, 실로 저열하고 야만적 행위이다.
인터넷 언론매체 또한 공영미디어의 윤리를 저버리지 말아야 국민의 인권의식 향상과 인권존중문화 확산에 기여하여 전반적인 국격을 올리는데 기여할 것이다.
요컨대 후보 부인들에 대한 과거나 현재적 사생활 스토킹은 공익을 위한 것이 아닌, 공익을 해치는 행위인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공인에 대한 인격권의 침해에 대해 독일처럼 인격권의 보호 영역을 구체화하고 세분화할 필요성이 시급하다고 본다.
둘째로, '쥴리 망동'은 한국의 고유한 망국적 접대부 문화에 젖은 저질 남성들의 아전인수격이고 후안무치한 인식의 문제가 가져온 결과이다.
이상한 것은 위 인터뷰에 응한 남자나 유튜버를 진행하는 남자들 모두 자신들이 그런 곳에 매우 익숙함을 아무렇지 않게 떳떳하게 자인하면서, 정작 그들을 응대한 타자적 여성이 접대부였다고 가십 방송을 퍼부어댄다는 것이다.
실로 어처구니 없는 해괴한 양심이 아닌가? 더구나 증인으로 말하는 남자는 철저히 신상을 가려준 채 말이다.
이야말로 재래적 한국 사회의 전형적인 음녀 프레임이며 저속한 일부 한국 남성들의 고질적인 집단관음적 부패상의 표본이다. 아마 전직 여성 대통령에게도 이와 유사한 성격의 인격훼손을 가했던 것으로 안다.
이와 같은 것이 여전히 한국 사회가 공유하고 당연시하는 가치관이라면, 이야말로 전복될 필요가 있는 성차별적 불공정한 인식이고 부도덕한 상식이 아니겠는가?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 자체는 죄가 되선 안 된다고 할 때, 그 진실은 적어도 공정하고 계도적이고 존재에 대한 영역 즉 프라이버시를 침범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말해지는 행동 규명적 진실이 되어야 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한국기자협회 윤리강령 및 실천요강 10항 중엔 위 유튜버들이 도외시하는 다음 3항이 들어있다.
2. 공정보도: 우리는 뉴스를 보도함에 있어서 진실을 존중하여 정확한 정보만을 취사선택하며, 엄정한 객관성을 유지한다.
6. 사생활 보호: 우리는 개인의 명예를 해치는 사실무근한 정보를 보도하지 않으며, 보도대상의 사생활을 보호한다.
9. 갈등·차별 조장 금지: 우리는 취재의 과정및 보도의 내용에서 지역·계층·종교·성·집단간의 갈등을 유발하거나, 차별을 조장하지 않는다.
이성적 사고력이 빈약한 무개념 사회일수록,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는데 좀 더 에너지를 쏟는 대신 취미나 재미삼아 공연히 남의 사생활이나 미래에 대해 궁금증을 일으키고 이를 즉흥적으로 손쉽게 해결해 보려 점쟁이들을 찾아가는 부끄러운 기자들이 늘어날 것이다. 마치 자신들의 이런 행위가 국민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 것인 양 착각을 하고 말이다.
4. 양심과 정직성 회복이 관건
필자는 이 글에서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밝혀둔다.
필자는 기독교인으로서 여당의 이 후보에 대해선 그가 소시적 불우한 환경으로 인해 소외되고 낮은 자들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눈을 일찌기 뜬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를 느낀다.
한편 윤 후보에 대해선 그의 '실언'보단 '서투른 표현'에 대해 방송에서 하루이틀 정도의 충고를 떠나 너무 장기간 연일 매시간 반복적으로 집중 포화를 쏘아댐으로써, 여론을 충동질하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해왔다.
어느 후보에게서나 표현이 잘못된 말꼬리만을 반복적으로 잡고 물고 늘어짐으로써 전체적 맥락을 흐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언론의 태도가 아니다.
언론의 이런 습성은 국민을 우민화하는 역기능을 가져오는 것이다. 방송의 역할이 국민 화합이 아닌, 피해자들의 상처를 오히려 덧나게 함으로써 파괴적인 불협화음을 낳는데 일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소모적이고 지혜롭지 않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다.
사람에 따라 생각보다 말 표현이 서투를 수도 있다. 말을 매끄럽게 잘한다고 반드시 그의 사고력이 그만큼 깊다고는 할 수 없다.
요번 한국의 두 대통령 후보에 대해 도덕성 이슈가 가장 큰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저마다 정치적이고 피상적인 도덕성 운운 이전에, 심층적이고 구체적인 양심과 정직성을 회복하려 노력하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양심과 정직성을 회복한다면 상식의 문제도 공정의 문제도 법치의 문제도 또 함께 잘 사는 문제도 자연 해결이 되리라 믿어지기 때문이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딤전 1:5)"
박현숙 목사
인터넷 선교 사역자
리빙지저스, 박현숙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9awEs_qm4YouqDs9a_zCUg
서울대 수료 후 뉴욕 나약신학교와 미주 장신대원을 졸업했다. 미주에서 크리스천 한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해 왔다.
시집으로 <너의 밤은 나에게 낯설지 않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