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널스>, 전혀 앞뒤 맞지 않는 끔찍한 혼종
현대 물리학 이론 활용해, 비교적 손쉽게 해결
필요한 설정과 이론 여기저기서 가져와 짜깁기
최근에는 오히려 이런 무질서와 혼돈 더 평가해
인간 삶과 역사 보다 온전하게 풍자하는 장치로
마블 작품들, 유독 다원주의 이념 적극 추종해
◈마블과 철학: 헤라클레이토스의 범신론적 세계관을 차용한 <이터널스>
마블의 새 영화 <이터널스>에는 선사 시대부터 인류의 생존과 번영을 도운 신화적 히어로 집단이 등장한다. 영화 설정상 이들은 수천년 동안 음지에서 인류 문명의 비약적 발전을 돕는 역할을 맡았고, 일부는 고대 인류에게 모습이 노출되어 신으로 추앙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전설적이고 영웅적인 히어로 집단 '이터널스'도 사실 그보다 상위의 존재에 의해 창조되고 이용당하는 처지에 불과하다. '셀레스티얼'이라는 초월적 외계 종족이 바로 이 이터널스의 창조자다.
강대한 힘과 높은 지능을 가진 셀레스티얼은 특정 조건이 갖춰진 행성 안에 씨앗을 심어 부화시키는 식으로 종족을 보존한다. 다시 말해 한 행성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개체를 얻는 것이다.
셀레스티얼이 부화시킬 알로 삼는 행성이 될 조건은 그 행성에 지적 생명체가 번성해서 수준 높은 문명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그 행성에 거하는 지적 생명체들이 산출하는 정신력을 에너지 삼아 셀레스티얼이 번식을 한다.
이렇게 새로 탄생한 셀레스티얼은 그 강대한 능력과 지성을 가지고 파괴된 행성 혹은 항성계를 대신할 새로운 항성계를 창조한다. 이렇게 해서 셀레스티얼은 우주 내 항성 및 행성의 생성소멸을 주관하게 된다.
이렇듯 초월적 힘을 가진 인격적-지적 생명체가 우주의 생성-성장-소멸의 질서를 주관한다는 <이터널스>의 설정은 고대 각국 신화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고, 서구 철학이나 동양 종교 사상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서구에서 이와 유사한 철학을 발전시킨 최초의 인물은 기원전 6세기, 소크라테스보다 한 세대 앞선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이다. 그는 고대 철학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범신론자로서, 우주 전체가 바로 신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존재의 진리를 파헤치려 노력했다.
그는 신의 본성이 생성과 성장, 소멸을 반복하면서 그 자신을 조화롭게 지켜나가는 우주적 질서인 로고스라고 주장했다. 이로써 헤라클레이토스는 서구 범신론 전통, 생성소멸 중심의 존재론 전통, 그리고 로고스론의 주창자가 되었다.
훗날 이 '로고스'라는 용어는 사도 요한에 의해 그 의미가 기독교적으로 새롭게 갱신되어 성경에 차용되기도 하였다.
▲<이터널스>의 최종 빌런이자 초월적 종족인 셀레스티얼. 우주 탄생과 소멸을 주관하는 종족으로 소개된다. |
헤라클레이토스의 신론 가운데는 신, 즉 우주의 완전한 소멸과 재탄생이라는 개념이 있다. 그는 우주가 일정한 주기로 대화재를 겪으며 이전의 우주가 소멸하고, 다시 새로운 질서를 가진 우주가 새롭게 탄생하며, 이런 과정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가르쳤다.
우주의 소멸과 생성이 교차하는 가운데 전체 질서가 유지한다는 사상은 동양 종교에서도 간간이 발견되는데, 대표적으로 도교의 태극사상이나 신종교에 널리 퍼져 있는 후천개벽사상을 예로 들 수 있다.
서구 철학에서도 이 전통이 암암리에 이어져 왔는데, 19세기 후반 니체가 이를 자기 사상의 전면에 내세운 바 있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이 바로 그것인데, 우주 전체가 일정한 주기로 영원히 같은 과정의 생성-성장-소멸 과정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믿음을 바탕으로 인간의 삶도 영원히 똑같이 반복되므로, 영원한 자유와 해방을 누리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주장을 내세웠다. 인간의 삶이 영원히 똑같이 반복된다는 것은 기존의 삶이 그대로 재현된다는 뜻도 되기에, 사실상 인간에게 선택지란 없는 꼴이기 때문이다.
◈마블과 과학: 마블 서사 속 빅뱅 이론과 다세계 해석
어쨌든 니체에 의해 서구 현대 철학사 전면에 재등장한 헤라클레이토스 우주론은 자연과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현대 천체물리학에서 빅뱅 이론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난 후, 이 빅뱅으로 인한 우주 확장이 끝나고 다시 빅뱅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우주 소멸의 수축(빅 크런치)이 계속해서 그대로 반복된다는 이론이 등장한 것이다. 진동 우주 가설이 바로 그것이다.
마블 코믹스의 세계관은 1940년대 초부터 시작해서 그 서사 스케일을 점차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시켜 왔다. 그래서 여기에 필요한 설정과 사상, 세계관을 기독교 신앙과 서구 철학, 유럽과 고대 근동 신화, 그리고 현대 물리학 이론으로부터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이터널스>의 주인공인 이터널스 종족과 궁극의 빌런 셀레스티얼 종족 역시 신화와 철학의 설정을 빌어 창안된 캐릭터들이다. 이들의 탄생을 위해서는 앞서 소개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과 고대근동 신화가 주로 동원되었다.
이렇게 새로운 히어로와 빌런들의 등장은 마블 코믹스 세계관을 보다 풍성하고 볼거리 많게 만들어주는 데는 성공했지만, 갈수록 설정과 세계관의 내적 불일치 및 충돌 문제를 낳았다.
마블 코믹스 작가들은 이 문제도 현대 물리학 이론을 활용해, 비교적 손쉽게 해결했다. 양자역학에서 파생된 가설, 평행세계론 혹은 다세계 해석을 통해 해결한 것이다.
▲마블 코믹스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수많은 히어로와 빌런들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서사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설정 충돌이 발생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세계 해석이 도입되었다. |
이 이론은 마치 전자가 아원자 단계에서 여러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는 가능성의 파동인 것처럼 우주 역시 서로 연관성을 가진 '우주들'이 한꺼번에 여럿 존재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마블 코믹스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이 이론을 차용해서 설정의 충돌이 생기거나 스토리 리셋이 필요할 경우, 작품의 배경을 다른 시공간에 있는 비슷한 형태의 우주로 거침없이 옮겨버린다.
이렇게 잡다한 종교적 가르침, 철학 사상, 신화와 전설, 그리고 과학 이론을 종합한 마블 서사는 부분적으로는 얼추 서사의 개연성이나 논리가 들어맞는 것 같지만, 전체를 본다면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비현실적 이야기들이 이리저리 뒤얽힌 끔찍한 혼종, 키메라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때그때 필요한 설정과 이론을 여기저기서 가져와 사용하다 보니, 서사 전체를 일관되게 연결할 질서가 자리잡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문화 조류는 오히려 이런 무질서와 혼돈을 더 사랑하고 높이 평가한다. 그 이유는 체계적 '구조'에 대한 의존이 인간 개개인의 삶의 자유와 개별성을 억압한다고 믿는 포스트구조주의가 문화 전반을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기본적으로 타자성에 대한 존중을 무엇보다 중요한 윤리적 방향성으로 설정한다. 그래서 개체마다 천차만별로 분화되어 있는 삶의 모습과 개성들 사이의 충돌을 삶의 본모습이자 정상 상태로 여겨 방관하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마블의 뒤죽박죽된 서사 설정과 세계관은 오히려 우리 인간들의 삶과 역사를 보다 온전하게 풍자하는 장치로 간주될 수 있다.
▲<이터널스>에 등장하는 히어로 종족의 일원, 길가메시(마동석 분). <이터널스>의 서사는 다른 마블 작품의 서사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설정 충돌과 서사의 내적 불일치를 짊어진 채 단편적인 개연성에 의존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
그런데 이 과정에서 도용된 각 종교, 철학 사상, 그리고 세계관에는 각각 내세우는 특정한 진리 주장이 있다. 마블 서사는 이 진리 주장을 혼란 속에 버무려 해체함으로써, 이들의 융합을 방해하는 배타성의 벽을 허물어 버린다. 여기에는 기독교가 진리로 여기는 그리스도의 복음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마블의 여러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터널스>를 통해서도 확연하게 드러나는 서사의 이런 혼종적 특성은, 진리 주장에 대한 도전과 해체를 환영하는 세태를 입증한다. 마블 작품들이 유독 다원성 이념을 적극적으로 추종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다원성 이념은 마블 서사의 정체성이나 다름이 없다. 그것이 없으면 마블 서사는 삶을 온전히 풍자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상충된 견해와 주장들을 이리저리 얼기설기 이어붙인 혼종으로밖에 인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