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교회사’ 저자 강석진목사
(Photo : 기독일보) ’북한교회사’ 저자 강석진목사

최초의 한글 성경이 백홍준에 의해 의주에 전해졌다. 그로인해 그곳에 자생적 기독교인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어서 만주의 동관교회에 있던 죤 로스 제자인 서상륜도 자신의 고향 의주로 돌아왔다. 그도 역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전도된 무리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이 소식이 관가에 알려지자, 서상륜과 동생 서경조는 체포되어 옥중에 갇히게 된다. 그러나 친지의 도움으로 옥에서 탈출하여 동생과 함께 친척이 있는 황해도 장연군 소래(송천) 마을로 피신하여 1883년 5월 16일 초가집에서 5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날과 장소가 한국 교회사에서 최초로 공인된 교회로 기록되었다. 이 교회의 창립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에 오기 2년 전이었음으로 선교사들에 의한 교회가 아니라 조선 기독교인에 의해 자율적으로 세워졌다는 데에 교회사적 의미가 큰 것이다.

그 두 형제는 그 마을에 열심히 전도하여 55호 주민 중에 50호의 가정이 예수를 믿게 됨으로 사실상 그 마을이 신앙공동체가 된 것이다. 서형제들은 한학에도 능통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한학과 한글을 가르쳐 그 문맹 마을을 문명 마을로 개화시켰다.

이들은 만주에서 봇짐 장사를 하며 다녔기에 청나라에 대한 많은 견물의 체험이 있었기에 교회 개척 시에 마을 사람들에게 청나라 이야기를 들려주며 성경의 창세기 이야기며 성경의 위인들에 대해 들려주자, 마을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그 마을의 복음화가 결실되었다.

이 두 형제는 그 지역뿐만 아니라 한성을 비롯해 곳곳에 다니며 전도를 하였다. 그러한 사역에 저들이 가장 필요되는 것이 성경이었기에 서상륜은 죤 로스 선교사에게 성경을 조선에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죤 로스는 6천 여권의 조선 성경책을 제물포로 보내었다. 이 당시 조선은 일본과 미국과 통상 관계가 성립되어 세관이 있었고, 세관장이 청나라에서 파견한 초대 뭴렌도르프(Paul George Von Mollendrorff, 1848~1901)였다. 또한 그의 아내가 기독교인이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성경이 금서였기에 세관 통관이 불가능하였고 그 성경을 받는 수취인의 이름도 없었다. 만일 수취인이 밝혀지면 금서였기에 체포당하는 경우였다. 이를 알게 된 죤 로스는 뭴렌도르프에게 그 성경을 통관시켜 줄 것을 부탁하였으며, 그의 아내도 그 성경을 조선인들이 볼 수 있도록 선처해 줄 것을 남편에게 간청함으로 창고에 압류되었던 성경이 불법적으로 반출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한국 세관 역사에서는 최초의 밀수품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이 성경을 받게 된 서형제는 황해도와 한성(서울)을 비롯한 곳곳에 배포하고 다녔다. 한성에서 사역하던 언더우드는 자신들이 오기 전에 이미 조선어 성경이 배포된 사실을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언더우드가 조선에 들어올 때에 그의 손에는 1884년 조선에서 보낸 수신사였던 이수정에 의해 만들어진 한문 성경에 한글을 병기한 성경을 갖고 들어왔었다. 그런데 조선어로 완역된 죤 로스 조선어 성경을 보고 매우 경이롭게 생각했다. 그는 이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나는 복음의 씨를 뿌리러 온 것이 아니라, 이미 뿌려진 씨의 열매를 거두러 왔다"라고 하였다.

1887년 9월 27일에 서경조 형제는 소래교회 성도들과 함께 언더우드를 찾아 왔다. 그 이유는 그에게 세례를 받고자 함이었다. 이때는 아직 선교사들이 조선인들에게 전도와 세례를 주는 것이 불법이었기에 이를 바로 수용할 수 없었다.

언더우드에게도 고민되는 일이었으나, 그는 과감하게 저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의 사랑채에서 조선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백홍준과 서상륜에게 장로 장립을 하였다. 놀랍게도 이 자리에 죤 로스 선교사도 합석함으로 이남 지역에서 최초의 교회 창립에 큰 의미를 두게 되었다. 이로써 이북 지방의 토착 조선 기독교인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가 이남의 수도인 한성에 교회를 세우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지극히 작은 소래교회는 그 외에도 먼 외딴 섬인 백령도에도 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1898년 10월 9일에 백령도에서 한학 서당을 운영하며 관직에 있었던 '허득'(許得)이 소래교회를 지도하고 있던 서경조를 직접 찾아와서 백령도에도 교회를 세워줄 것과 지도자를 보내 줄 것과 창립 예배를 인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소래교회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지금의 백령도 중화동에 "중화동교회"가 창립되었다. 이 소식을 훗날에 들은 언더우드는 1900년 11월에 백령도를 찾아와서 허득을 비롯한 그곳의 결신자 7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교회를 지도하는 담임 목사가 되었다.

이런 먼 섬인 백령도에 교회가 세워진 데에는 지난 32년 전인 1865년에 토마스 선교사가 그곳에 와서 복음을 뿌렸기에 그 결실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백령도는 조선의 멜리데 섬(행28:1~10)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