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교회사’ 저자 강석진목사
(Photo : 기독일보) ’북한교회사’ 저자 강석진목사

1866년 제너럴 션만호의 평양 대동강의 무단 출현과 그 배에 성경을 싣고 온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사건은 한국의 근대사라는 일반 역사와 한국 교회사의 양면성을 함유하고 있다. 그 파급 영향이 1882년 미국과 수교로 이어지면서 조선의 근대사를 여는 계기가 되었고 그로 인해 1884년과 1885년 미국의 선교사들이 최초로 파송받아 입경함으로 한국교회 역사의 정사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토마스의 순교는 결과적으로 40여년 후에 1907년의 '평양 대부흥운동'에 한 알의 밀알로 심겨진 것이었다. 그의 대동강에서의 순교가 놀랍게도 그 이후에 다른 선교사들에게 연속적으로 영향을 미친 인과성을 갖고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먼저 토마스 선교사는 왜 조선에 셔만호를 타고 평양으로 들어왔는지 그 배경을 알아보아야 한다. 그는 원래 중국 상해로 파송받은 선교사였으나 아내가 출산 중에 사망하자 실의에 빠져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개항지인 산동성 엔타이(지프)로 와서 통역사로 일하던 중에 그곳에서 조선 백령도에서 건너온 김자평을 만났다. 놀랍게도 그는 천주교인이었으며 그로부터 조선의 천주교인들의 박해와 순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조선의 복음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토마스는 1865년에 그와 함께 백령도로 건너와서 수 개월을 지내면서 그 섬과 옹진반도의 해안 마을까지 접근하여 한문 성경을 배포하였고 약간의 조선어를 익혔다.

토마스는 다시 엔타이로 돌아왔는데, 마침 그즈음에 미국 국적 상선인 제너럴 셔만호가 통상차 중국에 왔다가 이어서 조선에도 통상을 할 계획을 세우고 평양으로 향하려 했고 통역사가 필요하였다, 마침 토마스 선교사가 이에 자원함으로 그 배에 승선하게 되었다. 그는 약 5백여 권의 한문 성경을 싣고 1866년 8월에 출항하였다. 이는 분명 조선 본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시도였고 선교적 목적을 품었던 것이다. 이 배에는 망원경과 자명종이라는 시계와 유리 그릇과 비단이 실려져 있었다. 엔타이항에서 출항한 이 상선은 백령도를 거쳐서 대동강 입구인 진남포로 들어서 평양 중심인 능라도 앞에 이르렀다. 토마스 선교사는 강을 따라 올라오면서 도중에 여러 강변 마을 사람들에게 성경을 배포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 조선에서는 매우 엄혹한 정국이었다. 다름 아닌 천주교들을 향한 박해가 1866년 2월로부터 시작된 '병인박해'로 전국에 약 8천 명 이상이 참수를 당한 상황이었다. 그 배는 평양 만경대 앞에 다달아 통상을 요구했으나, 이 당시 평양 감사인 박규수는 쇄국정책을 거스를 수 없었기에 통상을 거부하였고 돌아갈 것을 회유하며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장작까지도 제공하였다. 토마스는 그 배가 몇 주간 강변에 정박 중에 평양 주민들에게 야소(예수)를 믿으라며 성경을 힘써 배포하였다.

이 배는 조선 측과의 협상이 불발되자 급기야 조선군과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에 박규수의 지휘하에 화공법으로 맞서서 셔만호를 침몰시켰다. 그 와중에 그 배의 19명의 승선원들은 모두 목숨을 잃게 되었고, 토마스 선교사는 성경을 품고 뛰어내려 강변으로 올라왔으나, 군졸들에게 잡혀 박춘권이라는 군관에 끌려 나왔다. 이때에 토마스 선교사는 그에게 '야소'를 믿으라며 성경을 전했으나 이를 물리친 박춘권은 토마스 선교사를 참수형에 처했다. 그는 그 전투를 마무리하며 돌아갈 때에 그 책을 집어 들었으나 성경책인 줄 모르고 가져간 것이었다.

평양 감사 박규수는 셔만호를 물리친 승전 기념으로 그 배의 닻(anchor)과 달려있는 쇠사슬을 대동문 성벽에 걸어 놓았다. 그는 토마스 선교사가 뿌린 성경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관가에 바치도록 엄명을 내렸다. 주민들이 갖다 바친 성경을 박영식이라는 주사는 자기 집에 도배지로 발라버렸다. 그당시 대동강 변에서 전투가 벌어진 광경을 보았던 15살의 최치량은 성년이 되어서 그 관리의 집을 구입하여 평양에 여관으로 사용하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박규수의 공로를 치하하여 높은 관직을 주어 한성 왕실에서 봉직하게 하였다. 그는 실학의 북학파인 연암 박지원의 3대손이었으며 개화파를 이끄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후 그의 개혁 주장을 대원군이 받아들이지 않자 관직에서 물러나 개화파 청년들을 양성하였다. 그 대표적 제자들이 김옥균과 박영효, 서재필 등이었다. 이들이 후에 1884년 12월에 갑신정변을 일으키는 주역들이 된다.

토마스 선교사를 참수시킨 박춘권은 그 당시 40세가 지난 퇴역 군인이었며 셔만호 사건 때에 징발되였었다. 그는 셔만호 격침에 공로를 인정받아 평양 근처 안주골의 작은 벼슬을 하사받아 관직 생활을 하였다. 박춘권은 여생을 보내면서 토마스가 건내 주었던 한문 성경을 보면서 자생적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놀랍게도 사무엘 마펫 선교사가 평양 대동문 근처 널다리골에 1893년에 교회를 개척 중에 있었는데, 어느 날 60대 후반이 된 박춘권은 자기 발로 그 교회에 찾아와서 사무엘 마펫 목사에게 자신이 지난 날 어느 서양인을 죽인 당사자라면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다.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인 중에 한 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든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무슨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나에게 받으라고 권하였다. 내가 죽이긴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왔노라"고 했다.

어느 교회 역사가는 토마스의 순교에 대해 이같이 평가하였다. "토마스가 대동강에 흘린 순교의 피는 평양인들에게는 구원의 생명수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뿐만아니라 평양 대동문에 걸려있는 그 앵커는 훗날에 평양 주민을 구원하는 구원의 앵커(Anchor)가 된 것이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