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교회사’ 저자 강석진목사
(Photo : 기독일보) ’북한교회사’ 저자 강석진목사

1893년2월에 캐나다 출신 의료 선교사인 윌리엄 제임스 홀과 사무엘 마펫, 그레이엄 리(Graham Lee, 1861~1916)는 이북 서북지방(황해도,평안도)으로 선교지 탐사를 위해 순회 여행을 한 끝에 왜 평양이 최적의 선교지 인지를 선교 본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첫째, 이 평양 도성은 조선에서 가장 문란하고 더러운 곳이므로 선교의 도전 대상지이다. 둘째, 이들은 자기들의 기분에 맞지 않으면 일반인이건 관원들이건 막론하고 돌로 때리는 폭력배들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셋째, 인구가 10만명이 넘으며 주민들은 적극적이고 상업적이라 비교적 번성할 여지가 있는 곳이다., 넷째, 한성과 베이징 간을 연결하는 도로 선상에 위치하므로 육로 사정도 괜찮고 대동강을 통한 해상 교통도 용이한 점으로 볼 때 평양은 찬란한 역사의 도시임이 틀림없다."

이들이 이북지방 곳곳을 답사했던 이유는 조선의 수도인 한성에 선교사들이 집결되자 타지방으로 균형있게 분산될 필요가 있었다. 이로 인해 선교사들은 파송 국가와 단체가 달랐지만 선교지 분할에 대해 합의가 되어야했다. 새로이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에게는 새로운 선교지가 필요했고 선교지가 서로 중첩되지 말아야 했다. 이들은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12 지파별로 분배했던 것같이 조선 땅의 선교 지경을 나누게 되었다. 먼저 선교사 수가 많은 미국 북장로교는 경기와 이북 관서 지방을 감리교와 나누었고 강원도는 주로 감리교가 감당하게 되었다. 카나다 장로교는 함경도 지역을, 미국 남장로교는 호남지역을, 경상도 지역은 호주 장로교가 맡게 되었다.

그후 한국교회사의 자료를 보면 이남 지역보다 이북지역의 교회의 부흥이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 여기에는 선교사들의 개개인의 선교 전략이나 선교사들의 수의 크고 작음에 의한 요인도 있었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에는 그 당시의 지역적 또는 사회적 환경 요인이 매우 컸음을 보게 된다. 이는 그 당시의 교회 현황 자료가 입증하고 있다. 1898년 당시 조선의 장로교 전체 교인 수가 7,500여 명이었는데, 평안도와 황해도에 해당하는 서북지방의 교인수가 5,950명으로 전체 교인의 약 80%를 차지하였다.

이같은 현격한 결과의 원인으로는 첫째, 청일전쟁(1894~1895)중에 평양이 격전지가 되자 전쟁 중에 일반인들도 신변의 안전을 기대하고 교회로 몰렸다. 또한 전세에 따라 신앙인들이 황해도로 흩어지면서 교회가 분리 개척이 되기도 하였다.

둘째로는 서북지방에서는 양반 계층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는 왕실에서 이 지역의 인재들을 등용하지 않는 차별 정책으로 인해 지식층들은 유교의 전통 문화에 억매이지 않고 새로운 학문과 종교에 쉽게 심취하는 개방형적 의식이 강하므로 기독교의 가르침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였다. 이는 조선 최초의 장로교 7인 목사가 모두 이북 출신이며 양반 지식층들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예를 들어 한석진, 길선주, 서상륜, 서경조, 이기풍 등이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셋째로는 이북지방에는 자립적 중산층이 많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보수 성향이 아닌 진보적 의식이 강하였기에 기독교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넷째로는 선교사들의 사역 중심축이 한성과 경기도, 호남지역보다는 점차 평양을 중심으로 집중되었다. 그 증거로서 장로교의 경우 이북 서북지방에 기독교인 수가 1910년에 23,483명인데 반해 경기와 호남의 기독교인 수는 2,975명이었다. 선교사의 수도 이북 지역의 선교사와 이남지역의 선교사 비율도 45:25명으로 나타나 있다.

다섯째로는 선교사들의 선교 중점 지향이 이남에서는 주로 교육, 의료, 사회사업 등 문화 사역으로 나타났고, 이북 지역에서는 전도 사역과 교회 설립에 비중을 두었다. 뿐만 아니라 이북 지역 주민들은 개방성과 개척 성향이 강하여 그 지역의 복음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선교의 역사에 나타난 선교의 역할에는 두 가지가 병행 되었다. 첫째로는 복음화(Evangelization)와 문명화(Civilization)였다. 조선 말기에 왕실은 서양의 영향으로부터 봉건 왕조 유지가 급선무였기에 그 당시 선교사들의 사역을 늘 감시하면서 경계시하였기에 한성과 경기지역에서 교회를 세우며 복음을 전하는 데에는 늘 긴장과 절제가 필요로 하였다. 그 예로서 선교 초기에 최초로 조선에 들어와 왕실의 어의 역할을 하였던 알렌은 언더우드와 여러 선교사들과 사역 활동의 범위를 놓고 갈등이 매우 심각하기도 하였다. 그에 반해 평양을 중심으로 한 이북지역에서는 비교적 중앙 정부의 감시로부터 멀었기에 활달한 사역을 할 수 있었던 환경도 크게 작용되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