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을 2년간 구금하고 있었던 벨릭스는 계속된 유대인의 폭동과 소란으로 해임되었습니다. 특히 가이사랴에서 발발했던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벨릭스를 당시 로마의 황제였던 네로는 해고했습니다. 네로 황제는 벨릭스(Felix)를 해고 하고 그 후임으로 포르키우스 페스투스(Porcius Festus, 성경명 베스도)를 유대지역 총독으로 파견하였습니다.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신약배경사를 가르쳤던 마이클 목사(박사)는 유대지역 총독은 로마 정부의 주요 관심사였다고 말합니다. 20대 초반의 젊은 황제 네로는 스승이었던 철학자 세네카가 추천으로 베스도를 유대총독으로 임명했습니다. 아울러 세네카와 뜻을 같이했던 부로(Burrus) 총독도 베스도를 추천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베스도를 추천한 이유는 베스도의 온화한 성품과 합리적인 태도를 높이 샀다고 역사 자료는 전합니다.
갑자기 면직된 벨릭스의 후임으로 총독이 된 베스도는 벨릭스가 씨름했던 문제들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베스도는 유대지역 총독이 되기 전에 법관으로 근무했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그의 치적은 합리적이고 합법적이었던 것으로 평가 받습니다. 베스도는 2년 정도의 임기를 마칠 무렵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네로는 다른 총독을 보냈는데 그가 루시우스 알비누스(Lucceius Albinus)입니다.
네로의 명령에 의해 총독으로 부임한 알비누스 총독도 전임자들과 유사한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전임자인 베스도에 관해서는 침묵하지만 벨릭스 총독의 악행과 부정을 신랄하게 비난합니다. 통상 바로 후임자가 전임자의 비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알비누스 총독이 베스도를 비난하지 않고 벨릭스를 비난 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당시 유대는 로마 정권의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로마 정부에 고분고분하지 않았습니다. 또 유대 국민들도 로마 정부의 통제에 반발하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네로는 이런 유대 지방을 잠잠하게 다스려줄 온건한 총독을 찾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베스도가 추천되어 유대 총독으로 파견되었습니다. 베스도는 네로 황제와 추천자들의 기대대로 비교적 조용하게 유대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베스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습니다. 베스도에 관한 자료는 성경과 죠세푸스의 기록만 남아 있습니다. 다만 그의 이름(Porcius Festus)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삼두 정치 시절부터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던 포르키우스 가문 출신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이름 베스도(Festus)는 축제(Festival)혹은 기쁨(Joy)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베스도의 인품과 업무 스타일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가 죠세푸스의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베스도가 유대지역 총독으로 재임하던 시절에 유대 아그립바 왕이 예루살렘 궁전에 큰 식당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귀빈들과 파티를 즐기기 위해 만든 식당은 높은 곳에 위치했습니다. 그래서 식당에서 예루살렘 시내 전체와 성전 안이 훤히 내려다 보였습니다.
궁궐에 성전 안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식당이 만들어 졌다는 소식을 예루살렘 유대인 지도자들이 들었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성전에서 이뤄지는 거룩한 일들을 왕과 왕의 손님들이 본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분노했고, 시야를 가리기위한 벽 건축 공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벽은 왕궁의 조망을 막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 안토니아 부대(Fort Antonia)의 망루의 시야도 막았습니다. 그래서 이 높은 담에 대해 베스도 총독이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베스도 총독이 그 담을 허물 것을 명령합니다. 유대인들이 베스도의 명령에 반발합니다. 이에 베스도는 유대인들에게 로마 네로 황제에게 이 문제를 직접 제소하게 합니다. 베스도는 자신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을 감수하고 유대인들이 로마황실에 제소하게 했던 것입니다. 베스도는 평화를 원했던 것입니다.
결국 네로는 유대인의 손을 들어 줍니다. 당시 네로의 아내가 둘째 부인 포피아 사비나(Poppea Sabina)였습니다. 포비아는 나름대로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습니다. 그녀가 유대교와 성전 그리고 유대교 지도자들과 유대 백성을 도왔다고 죠세푸스는 전합니다. 베스도는 당시 네로가 친 유대교적 성향이었음을 알면서도 예루살렘 성전 벽 사건을 네로에게 직접 제소하도록 안내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베스도 총독이 평화 지향적인 태도를 가졌다는 것을 설명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베스도는 바울의 무죄를 인정합니다. 이 의견에 가이사랴를 방문했던 유대의 왕 아그립바 2세와 그의 아내이자 여동생인 베니게(Bernice도 동의합니다. 아그립바 왕은 베스도에게 "만약 바울이 로마황제에게 상소하지 않았으면 석방될 수 있다(행26:32)"고 말합니다. 이들은 바울의 요청대로 네로 황제의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로마로 보냅니다.
베스도의 전임자 벨릭스(Felix)의 아내는 아그립바 2세의 동생 드루실라였습니다. 드루실라가 유대 사회의 상황을 잘 알았고 바울과 산헤드린의 갈등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벨릭스도 바울의 무죄를 알았지만 (뇌물을 받고 싶은) 개인적 욕심과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는 정치적 욕심 때문에 바울을 2년 동안 감금했습니다. 반면 베스도는 바울의 무죄를 알고, 바울의 요청대로 로마로 보냅니다. 베스도 까닭에 바울의 로마 선교는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