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올라간 바울은 체포당합니다. 체포된 바울이 로마 총독이 머무는 가이사랴(Caesarea)로 옮겨져 2년간 구금 생활을 합니다. 이 가이사랴는 백부장 고넬료(Cornelius)가 근무했고, 베드로를 초청했던 곳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이었던 빌립집사가 전도자가 되어서 선교를 하다가 정착해서 살았던 곳이 가이사랴입니다. 행12장에 헤롯 아그립바왕이 가이사랴에서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두로와 시돈에서 가까운 이 가이사랴는 헤롯의 아들 빌립이 통치하면서 만든 도시 가이사랴 빌립보와 다릅니다. 헤롯 빌립은 자신과 로마의 황제 가이사랴(Caesarea)이름을 넣어 도시의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이 가이사랴 빌립보와 다른 가이사랴 마리티마(Caesarea Maritima:바닷가의 가이사랴) 혹은, '팔레스타인의 가이사랴 (Caesarea Palestine)'라고 불렸는데, 지중해 해안가에 우뚝 선 로마시대 행정 도시였습니다.
가이사랴는 원래 페르시아 시대에는 베니게(Phoenician)사람들이 거주했던 스타라토 망대(Strato's Tower)라는 도시였습니다. B.C.103년 로마가 정복하였고, 가이사랴 황제가 헤롯대왕(Herod the Great)에게 주었고 헤롯대왕은 대대적인 공사를 통해서 국제 해양 도시로 가이사랴를 건설했습니다. 건축 전문가였던 헤롯대왕은 괄목할만한 건축물을 남겼습니다. 예컨대 예루살렘 성전 건축, 여리고 겨울 궁전, 사해해변에 세운 마사다 요새 건축 등이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가장 주목 받는 업적이 가이사랴의 건설입니다.
헤롯대왕은 가이사랴 건설 공사를 진두지휘하였습니다. 헤롯은 이 도시를 정치적 후원자인 가이사랴(Caesarea Augustus)황제에게 헌정합니다. 헤롯은 이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전부를 투자했다고 성서 지리학자인 데이빗 패드필드(David Padfield) 목사는 주장합니다. 건축전문가였던 헤롯대왕이 온 정성을 다해 건설했습니다. 가이사랴의 규모와 수준은 현대의 전문가들도 인정할 만큼 엄청난 시설을 가진 도시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라이벌 도시로 부상할 만큼 로마가 자랑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가이사랴는 놀라운 인공 항구도시입니다. 가이사랴는 현대의 건축술로도 상상하기 어려운 화려한 도시입니다. 석회암(Limestone)이 많이 사용되었고, 도시 중심가에서 극장으로 연결된 도보는 모자이크 벽돌로 구성되었습니다. 수천 개의 기둥들이 도로변에 세워졌고, 그 중에 1천300개가 발굴되었습니다. 당시 가이사랴의 활발한 해양 무역을 가늠케 하는 대형 물류 창고가 발굴되었습니다. 아울러 고대 중국의 도자기가 가이사랴에서 발굴되어 중국과의 교역이 있었다는 것을 유추하기도 합니다.
헤롯대왕은 가이사랴에 궁궐, 로마황제신전, 극장, 시장, 경기장, 원형극장 그리고 상하수도 시설 등을 건설했습니다. 바다를 바라보는 극장은 45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극장입니다. 극장 유적에서 본디오 총독 빌라도(Prefect Pontius Pilate)의 이름이 새겨진 돌이 발굴되었습니다. 사도행전12:20~23에 헤롯(아그립바)왕이 백성들에게 연설하고 하나님의 벌을 받아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이 극장에서 연설하고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유대인 사학자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는 헤롯 아그립바왕이 닷새 동안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가이사랴의 헤롯 항구는 지금의 기준으로도 대단한 시설과 규모를 자랑합니다. 요세푸스는 헤롯 항구를 아테네 항구인 피레우스(Piraeus)와 비교하면서 경이로운 시설이라고 극찬하였습니다. 주변에 섬도 없고, 만도 없는 조건 속에서 이런 항구의 건설은 역사상 최초의 건설공사로 알려집니다. 아쉽게도 이 항구는 AD. 130년경에 있었던 지진으로 파괴되었습니다.
가이사랴는 물이 부족했습니다. 목욕 문화가 발달했던 로마시대에 물이 부족한 도시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갈멜산Carmel) 수니(Shuni) 샘에서 상수도로 물을 관개했습니다. 이 상수 시설은 인구증가로 확장을 거듭해서 그 후 수로(水路:Aqueduct) 공사가 15차례나 있었습니다.
가이사랴 도시화 공사가 끝났을 때 가이사랴는 팔레스타인에서 예루살렘과 쌍벽을 이루는 대도시가 되었습니다. 가이사랴는 다양한 인종들이 살았고, 인구는 10만 명이 넘었습니다. 도시를 건설한 후 곧 로마 총독이 주둔하는 유대지방(후에 팔레스타인지방)의 행정수도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로마의 천부장과 백부장이 주둔하는 군사도시가 되었습니다.
가이사랴는 정치적 중심 도시로 시작해서 군사도시와 상업도시로 성장을 했고 초기 기독교의 중심 도시가 되었습니다. AD 3세기경에는 초대 기독교 철학자인 오리겐이 20년 이상 거주했습니다. 또, 오리겐이 자랑한 도서관이 있었는데, 장서가 3만권이었습니다. AD 4세기에는 콘스탄틴 대제의 종교 분야 자문관이었고, 최초의 교회사가(敎會史家)로 알려진 유세비우스가 가이사랴의 첫 감독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비잔틴 시대에도 가이사랴는 계속 발전했습니다. 6세기에 성벽이 완성되어 요새화 되었고, 아랍 전쟁후 잠시 쇠퇴하였으나 7세기에 다시 요새화 되었습니다. AD 1101년에 십자군에 의해 점령된 이후에는 십자군에 의해 다시 요새화 되었습니다. 가이사랴의 성장세는 13세기 십자군 전쟁 이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성서 지리학자인 데이빗 패드필드는 '동방견문록을 썼던 마르코 폴로의 출발지가 가이사랴였다'고 주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