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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인이나 연예인의 집을 대신 정돈해 주는 <신박한 정리>라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가끔 채널을 돌리다가 이 방송이 나오면 나는 스킵하지만, 아내는 들여다보는 편이다.

어지러운 집안을 정돈해 전과 후를 보면 특별히 인테리어를 더한 것도 아닌데 훤칠하니 다른 집처럼 보일 때가 있어서 감탄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다지 인기가 없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큰 집에 사는 것이 더 신박하게 느껴질 때도 꽤 있다.

"정리 안 해줘도 되니까 저만한 집에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저만큼 물건을 버리고 시작하면 누가 정리 못해...."
"우리도 저런 공간이 있어야 되는데 이 집은 답이 없어."
"..."

이런 대화를 나누다 보면, 결국 화살은 나한테 돌아온다. 언제 이사 갈 거냐, 이 오래된 집을 어쩔 거냐, 화장실 두 개인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 등. 도대체 누가 저딴 프로그램을 만든 건지, 먹고 살 만한 사람들을 뭘 정리까지 해준다고 난리인지.... 게다가 정리도 받고 출연료까지 받을 테니 배가 아프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쪼잔한 투덜거림이 나오게 만드는 그 방송을 보다 보면, 본질은 사라지고 숨은 욕망과 위화감만 올라오는 느낌이다. 물론 모든 방송이 그렇고, 아예 새 집을 구해주는 프로그램도 있으니, 세상 모든 것이 우리의 욕심과 비교의식을 부추기는 셈이다.

그러다가 든 생각이, 우리 집만 한 곳도 부러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텐데, 하는 자각도 생긴다. 자연스럽게 옛 생각으로 접어든다.

거의 20년 전까지 전세로 살던 집들은 더 좁고 더 열악했다. 쥐가 나온 적도 있고, 방범창이 없어 도둑을 두 번이나 맞은 집도 있었다. 몇 번을 이사 다니면서 집주인 때문에 계약기간 전에 쫓기듯 나와야 했던 집도 있다.

지긋지긋해서, 경매 나온 집을 전세금에 대출을 보태 헐값에 사 버렸다. 그때도 새 집이 아니었으니 지금은 낡아서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지만, 처음에 집을 살 때는 엄청 기뻤던 기억이다,

나는 욕심이 없다기보다 순리대로 사는 편이고, 집이나 자동차 욕심보다 낭만적 욕구가 많은 편이라, 억지로 부를 축적하는 쪽으로 살지 않았다. 뜻대로 될 리도 없지만 말이다.

한편 내 직업이 이토록 빨리 사양산업이 될지도 예상 못해서 방심한 측면도 있다. 그래도 외벌이로 여태 버틴 것도 감사하고 신기하다.

아내도 습관적인 잔소리가 많지만 거창한 욕심은 없다. 주변과의 비교나 부추김만 없어도 훨씬 편할 텐데, 세상은 사람을 그냥 두질 않는다. 좀 쉬어가려 해도 현실에 안주한다고 큰일 나는 것으로 아는 세상은 자족을 죄악시하는 분위기다.

2

나에게는 환경과 물질의 욕심을 철저하게 버리게 된 계기가 인생에서 두 번 있었다.

첫째는 군에서 제대할 때다. 현역이 26개월 정도 하던 때 18개월의 전투방위였는데, 한 달에 일주일은 야전에서 임무를 수행할 정도로 훈련이 빡빡해서 적성에 맞지 않았다. 군대 문화 자체도 싫었고, 훈련과 인간관계도 다 힘들었다.

드디어 마지막 날, 중대원들에게 소감과 인사말을 하고 부대를 나서기 전 나는 결심했다. 아니, 저절로 결심이 됐다.

"나는 이제 이 정도로 나의 시간과 자유를 강제로 억압하는 일이 아니면 무조건 만족하고 자족하며 즐겁게 살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생각과 느낌을 절대로 잊지 말자."

정말 그 뒤로 얼마나 신나게 살았는지 모른다. 신나게 일하고 열정적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며 살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남들이 싫어하는 월요일이 나는 제일 신났다. 원하는 분야의 일을 하게 된 것이 큰 이유였지만, 일과 놀이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신나게 살았다. 젊을 때는 더더욱 무엇을 하더라도 군대에 있는 것보다는 백 배 나았으니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었다.

둘째 계기는, 아들이 네 살 때 감전사고로 두 달 가까운 화상전문병원 생활을 할 때였다. 아내는 병원에서 꼼짝 못하고 온 가족이 흩어져 살았는데, 나는 차로 한 시간 거리의 병원을 오가며 기도하랴, 일하랴, 큰아이 돌보랴 정말 분주했었다.

그때도 아이가 퇴원하고 온 가족이 함께 있는 것 이상의 소원은 없었다. 물질이나 조건에 대한 욕구는 모두 사치였다.

사람이 어떤 것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 일이 이루어졌다면, 감사하면 그만이다. 아들이 퇴원한 뒤 실제로도 나는 큰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해 놓고 들어줬더니 또다시 더 나은 조건을 바라보며 투덜댄다면, 그 전의 기도가 가짜이고 감사도 가짜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도와주고 응답해 주신 하나님 앞에 염치없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이전의 응답이 취소될까 두렵기도 했다.

3

사람들은 욕심이 있어야 부자도 되고 좋은 조건의 삶을 쟁취할 수 있다고 부추기며, 교회에서조차 하나님의 축복에 욕심을 내서 부르짖고 구하는 자에게 더 나은 여건을 주신다고 가르친다.

언제 하나님이 구하면 다 주신다고 했나. 구하되 무엇을 구하라고 하셨는가? 구할 것은 주의 나라와 그 분의 의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먹을 것 입을 것 걱정 말라 하셨고, 가진 것에 만족하라 하시지 않았는가.

이 원칙을 따르는 사람은 바보 되는 요즘 교회들.... 정말 다니기 싫게 만드는, 세상 못지않은 생존의 법칙으로 돌아가는 또 하나의 정글이다.

물론 너무 자족하는 삶은 발전이 없어서 가족에게 큰 혜택을 제공하지 못할 수 있다. 사치와 허영이 아니라면 좀 더 발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안 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더욱이 돈과 물질로만 성공의 기준을 따질 수 없는 것이니 성공이니 실패니 하는 자체가 우스운 일이기도 하다.

자식을 잘 키운 사람이나 부부 사이가 원만한 사람, 친구가 많은 사람도 성공이고, 병원에 자주 안 가고 건강하게 산 사람도 성공이다.

물질을 갖고도 불행한 사람이 많다. 가족과 불화하고 원수가 되며, 울고불고 한다. 돈이 좀 모자라면 딴 생각 않고 열심히 살았을 사람들도 돈 때문에 이것저것 기웃거리다 돈을 날리기도 한다.

군대에 계속 묶여 있는 조건이라면 좋은 차가 무슨 소용일까. 자식이 병원에 있고, 온 가족이 함께 사는 것 외에는 바랄 것이 없는 상황에서, 누가 퇴원하는 것 대신 좋은 집으로 옮겨 갈 생각이나 로또에 당첨될 꿈을 꾸겠는가.

미래에 올 나의 모든 축복을 가불해서라도 그 상황을 끝내고 싶은 생각밖에 없는 법이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엄청난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육신과 마음의 질병으로, 생활고로, 가족간의 불행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코로나로 인한 실직과 우울로 아직 어린아이들을 남긴 채 극단적 선택을 한 주변 이웃 이야기도 들린다.

그런 불행과 도탄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미래의 축복보다는 오직 다시 살 수 있는 희망과 시간을 과거로 되돌리고 싶은 소망뿐일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영 죽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 인간의 혼이다. 구원이란 인간의 능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죽음의 취소'다.

본인은 느끼지 못했을지언정, 그 상태는 극한의 절망 상태다. 거기서 구원을 받는 것은 더 이상의 축복과 다행이 없을 정로도 매우 큰 사건이다.

그래서 이 선물을 받은 사람은 평생 하나님께 헌신하거나 모든 기득권을 버리며, 헛되고 헛된 것에서 눈을 돌려 하늘에 보화를 쌓는다. 종종 욕심이 생길 때는 이것만으로도 이미 가장 값진 것을 소유한 인생임을 상기해야 한다.

4

자족이란 현재를 기뻐하는 일이다.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미래의 희망을 품는 것이나, 갖지 못했지만 가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나는 부자라고 생각하는 것을 긍정의 힘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자족이란 나를 행복하다고 세뇌하거나 포장하는 것이 아니며, 지금 상태가 부족하든 넘치든 감사하는 상태다.

하지만 남녀가 미래를 설계하거나 함께 사는 데는 '자족'도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나는 이미 만족하는데 배우자는 더 큰 야망이 있고 현실에 만족을 못 한다면 그것은 늘 논쟁이 된다.

상대방 입장에서는 너무 발전성이 없고 노력이 부족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정도와 속도가 안 맞으면 두 사람 다 언제까지나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플 수 있다.

그러므로 연애를 할 때는 '자족'의 상한선과 하한선을 어느 정도 협의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직 그런 것을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은 젊은 부부도 마찬가지다. 대개 연애할 때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막상 결혼하고 분주하게 살다 보면 어떤 것도 결정하지 않은 상태일 수가 있다.

미래를 위한 진지한 대화는 그래서 중요하다. 자녀는 얼마나 낳을지 대개 결정들을 한다. 하지만 삶의 수준에 대해서는 상한선 없이, 갈 수만 있으면 끝까지 가보려고 한다. 자녀계획을 세우듯이 삶의 부요함에 대해서도 서로 어느 정도 결정해야 한다.

안 그러면 누구도 부자가 될 수 없다. 요즘 설문조사 결과에 따라 40억 정도의 부동산과 현금이 있어야 부자로 여기고 만족할 것인가? 그렇게 된다 해도 그때는 1백억 자산가가 나를 내려다보기 때문에, 여전히 배가 고플 것이다. 이런 삶은 불행하다.

나는, 우리는 어느 정도 살면 감사하고 만족할지 생각해 봐야 한다. 남들을 철저히 배제할 순 없지만, 비교하지 말고 일단 나부터 생각해야 한다.

그 기준은 천차만별이겠지만, 능력 안에서 적정선을 결정해야 한다. 그래야 남부럽지 않은 부자로 살 수 있다.

나중에 능력이 더 생기면 조금 그 선을 올릴 수 있겠지만, 우리 가정의 '천장'을 만들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올라도 언제까지나 공허하고 다리에 힘만 빠질 것이다.

뻥 뚫린 하늘만 바라보며 동아줄이 내려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마음의 천장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땅을 바라보며 사다리를 만들어 지붕에 올라 세상을 보아야 한다.

행복은 조건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눈높이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서로 설득되지 않는 부부는 행복하기 어렵다.

어느 한쪽이 맞춰줘야 하는데 낮은 쪽으로 통일하기 어렵기 때문이며, 언제든지 절제이라는 이름으로 억누른 가짜 자족이 머리를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기준이란 도대체 어디쯤일까. 각자 판단할 일이지만, 말씀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눈높이를 더 낮춰야 할 것만 같다.

"... 만족(자족) 하면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큰 이득이 되느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아니하였은즉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 확실하니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우리가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니라. 그러나 부유하게 되고자 하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느니라(딤전 6:6-9)".

그러니까 우리 대부분은 이미 충분히 행복한 상황이다. 그것을 인지한 상태에서 연인이나 배우자와 깊은 대화를 나눌 일이다.

상대방이 불신자라면 말씀이 안 통할 수 있겠지만, 끝간 데 없는 목표가 부르는 불행에 대해 알리고 참된 행복을 말한다면 서로가 진 짐을 많이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이상적인 생각일지 모르지만, 자족에의 상한선에 대한 논의는 부부와 연인에게 꼭 필요한 일일 것이다. 한 번 시도해 보라. 어쩌면 오늘부터, '부자 1일'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김재욱 작가

사랑은 다큐다(헤르몬)
연애는 다큐다(국제제자훈련원)
내가 왜 믿어야 하죠?, 나는 아빠입니다(생명의말씀사) 등 40여 종
https://blog.naver.com/woogy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