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한국 여행길에서 재미있었던 것이 어디를 가도 남자 화장실에 붙어 있는 “아름다운 사람은 떠난 자리도 아름답습니다.”라는 글입니다. 미소가 저절로 나오는 좋은 글입니다. 옛날 제가 자랄 때는 경고의 의미로 가위를 그려놓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지혜로운 아이디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머무르는 곳에 우물을 팠습니다. 그 자리를 떠나야 하더라도 뒤에 올 사람들이 그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교회 현재의 건물 건축을 할 때에 “우리도 우리가 심지 않은 나무에서 열매를 먹었습니다. 우리도 비록 우리가 그 열매를 먹지 못할지라도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신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머무는 곳에서 우물을 파고 나무를 심는” 사명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옛날 80년대 저는 대학목회를 하며 학생들을 선동하면서 “새 역사의 고향을 향해 달려가는” 코리언 어메리칸의 사명에 대해 열을 토하고는 했었습니다. 참 막연한 관념적인 말이지만 그런 말이 그때는 왜 그렇게 제 가슴을 뜨겁게 했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가끔 누군가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 자꾸 웃음이 납니다. 어떻게 보면 나이에 따라 순수와 이성을 잃어가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것만이 아니라 그런 멋있는 말로 역사가 변하지 않는 다는 것에 대한 조금은 냉소적 현실주의자가 되어버려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새 역사의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보다는 ‘우물을 파고 나무를 심는 믿음의 순례자’가 지금은 더 친근하네요.
안도현 시인이 “아들아, 지는 꽃의 힘을 아느냐”에서 “이 가을에는 부디 그 앞에서 겸손해지기 바란다.” 한 것처럼 ‘지는 꽃’ 없이 열매는 가능하지 않은 것입니다. 가을은 우리에게 감사와 겸손을 동시에 요구합니다. 요즘 저는 가을을 즐기고 있습니다. 특별히 아틀란타의 가을은 정말 맑습니다. 그리고 서늘함과 따스함을 모두 간직하고 있어서 좋습니다. 아틀란타는 멀리 나가지 않아도 하늘이 있고 나무들이 있고 가을 냄새가 있어서 좋습니다.
‘이 가을엔’(송호일)이란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이 가을엔/ 매일 아무런 느낌도/ 감동도 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의 무서운 타성을/ 깨워 주셔서/ 처음 당신이 인간을 만드실 때/ 빚어주신 그 단순하고 깨끗한 영혼으로/ 회복시켜 주소서….내게 허락하신/ 이 생명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땀 흘릴 수 있는 일과 건강,/ 늘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줄 아는/ 신선함과 넉넉함, 그리고 잔잔한 평화/ 그러나 너무 바빠 왜 사는지를 묻고 싶을 때,/ 또는 아무도 없는 듯한 외로움이라 근원을 알 수 없는 슬픔에 빠질 때/ 언제라도 부를 수 있는,/ 부르기만 해도 눈물이 고이는/ 그런 이름이 내 곁에 있다는 것을 / 알게 하소서/ 이 가을에 싸늘해진 바람보다/ 더 싸늘해진 우리들의 가슴에/ 온기를 주셔서/ 돌아볼수록, 생각할수록/ 끝없이 베풀기만 하는 당신의 변함없는 사랑을/ 입술로, 가슴으로, 영혼으로 고백하는/ 뜨거운 은총이 있게 하소서/ 무심히 넘기진 않았는지 돌아볼 줄 아는 마음을 주소서”
오늘 저는 오후에 애틀란타 한국순교자 천주교회 30주년 기념 세미나에 순서를 맡아 참석하게 됩니다. 우리교회 30주년 때 그 성당 신부님을 초청했었는데 답례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알고있는 캐톨릭 신앙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 살았던 장애우 공동체 Day Break의 목사 헨리 나운, 브라질 빈민의 아버지 돔 헬더 까마라, 기도하는 사람들의 거룩한 삶이 거룩한 세상을 만드는 것을 가르쳤던 트래피스트 수도원의 토마스 머튼과 같은 분들과 더불어 사회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먼저 생명과 사랑 그리고 평화의 정신을 가르치고 무엇보다 세상을 바꾸려면 먼저 “밑으로 기어라”고 가르치신 장일순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모두 살아 생전은 물로 떠난 이후도 더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분들입니다. 가을이 좋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머무르는 곳에 우물을 팠습니다. 그 자리를 떠나야 하더라도 뒤에 올 사람들이 그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교회 현재의 건물 건축을 할 때에 “우리도 우리가 심지 않은 나무에서 열매를 먹었습니다. 우리도 비록 우리가 그 열매를 먹지 못할지라도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신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머무는 곳에서 우물을 파고 나무를 심는” 사명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옛날 80년대 저는 대학목회를 하며 학생들을 선동하면서 “새 역사의 고향을 향해 달려가는” 코리언 어메리칸의 사명에 대해 열을 토하고는 했었습니다. 참 막연한 관념적인 말이지만 그런 말이 그때는 왜 그렇게 제 가슴을 뜨겁게 했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가끔 누군가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 자꾸 웃음이 납니다. 어떻게 보면 나이에 따라 순수와 이성을 잃어가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것만이 아니라 그런 멋있는 말로 역사가 변하지 않는 다는 것에 대한 조금은 냉소적 현실주의자가 되어버려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새 역사의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보다는 ‘우물을 파고 나무를 심는 믿음의 순례자’가 지금은 더 친근하네요.
안도현 시인이 “아들아, 지는 꽃의 힘을 아느냐”에서 “이 가을에는 부디 그 앞에서 겸손해지기 바란다.” 한 것처럼 ‘지는 꽃’ 없이 열매는 가능하지 않은 것입니다. 가을은 우리에게 감사와 겸손을 동시에 요구합니다. 요즘 저는 가을을 즐기고 있습니다. 특별히 아틀란타의 가을은 정말 맑습니다. 그리고 서늘함과 따스함을 모두 간직하고 있어서 좋습니다. 아틀란타는 멀리 나가지 않아도 하늘이 있고 나무들이 있고 가을 냄새가 있어서 좋습니다.
‘이 가을엔’(송호일)이란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이 가을엔/ 매일 아무런 느낌도/ 감동도 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의 무서운 타성을/ 깨워 주셔서/ 처음 당신이 인간을 만드실 때/ 빚어주신 그 단순하고 깨끗한 영혼으로/ 회복시켜 주소서….내게 허락하신/ 이 생명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땀 흘릴 수 있는 일과 건강,/ 늘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줄 아는/ 신선함과 넉넉함, 그리고 잔잔한 평화/ 그러나 너무 바빠 왜 사는지를 묻고 싶을 때,/ 또는 아무도 없는 듯한 외로움이라 근원을 알 수 없는 슬픔에 빠질 때/ 언제라도 부를 수 있는,/ 부르기만 해도 눈물이 고이는/ 그런 이름이 내 곁에 있다는 것을 / 알게 하소서/ 이 가을에 싸늘해진 바람보다/ 더 싸늘해진 우리들의 가슴에/ 온기를 주셔서/ 돌아볼수록, 생각할수록/ 끝없이 베풀기만 하는 당신의 변함없는 사랑을/ 입술로, 가슴으로, 영혼으로 고백하는/ 뜨거운 은총이 있게 하소서/ 무심히 넘기진 않았는지 돌아볼 줄 아는 마음을 주소서”
오늘 저는 오후에 애틀란타 한국순교자 천주교회 30주년 기념 세미나에 순서를 맡아 참석하게 됩니다. 우리교회 30주년 때 그 성당 신부님을 초청했었는데 답례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알고있는 캐톨릭 신앙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 살았던 장애우 공동체 Day Break의 목사 헨리 나운, 브라질 빈민의 아버지 돔 헬더 까마라, 기도하는 사람들의 거룩한 삶이 거룩한 세상을 만드는 것을 가르쳤던 트래피스트 수도원의 토마스 머튼과 같은 분들과 더불어 사회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먼저 생명과 사랑 그리고 평화의 정신을 가르치고 무엇보다 세상을 바꾸려면 먼저 “밑으로 기어라”고 가르치신 장일순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모두 살아 생전은 물로 떠난 이후도 더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분들입니다. 가을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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