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 교리 유지, 시대에 맞게 설득력 있게 복음 전파
한국교회, 반공의식 무장한 밥 피얼스와 긴밀 관계
한경직 목사 등과 협력 통해 한국 기독교 뿌리 내려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박명수 박사) 제25회 영익기념강좌가 '한국사회 형성과 기독교 사회복지'라는 주제로 31일 오전 부천 서울신대에서 개최됐다.
이날 강좌에서는 박명수 소장이 '한국전쟁 전후의 월드비전 창립과 활동', 박창훈 교수(서울신대)가 '세계구호위원회의 한국활동과 그 의의'를 각각 강연했다.
먼저 박명수 교수는 "1950년 미국 복음전도자 밥 피얼스(Bob Pierce, 1914-1978)에 의해 한국 어려운 선교기관을 돕기 위해 시작된 월드비전은 아동 후원 프로그램을 점차 발전시켰고,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기독교 자선단체가 됐다"며 "많은 학자들은 월드비전의 성공이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변화하는 상황에 잘 적응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월드비전 설립 배경이 되는 미국 복음주의를 살폈다. 그는 "미국 복음주의는 진화론을 둘러싼 1925년 스콥스 재판사건 이후 공적 영역에서 물러났다. 미국 교회의 주류는 진보주의가 장악했고, 개인구원보다 사회구원을 강조했다"며 "공적 영역에서 물러난 근본주의는 개교회 차원에서 새로운 부상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중 속으로 깊이 들어가 순수한 신앙과 종말론을 강조했고, 성경학교를 열어 자신들의 세계관을 전하면서 네트워크를 구축했으며, 방송을 통해 이를 공격적으로 전파했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종전과 함께 새롭게 등장한 복음주의 운동은 수면 아래서 조용하게 성장하던 복음주의 기독교를 수면 위로 드러나게 만들었따. 이들은 개인 구원과 함께 공산주의로부터 자유 세계를 지키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며 "이들에게 공산주의는 모든 세속화의 총화이자 결정체였고, 미국적인 문화와 기독교를 위협하는 대적이었다"고 분석했다.
그는 "종전 이후 하나님이 미국에게 민주주의와 기독교 전파라는 사명을 주셨다는 '명백한 운명(Menifest Destiny)'을 믿는 신앙은, 새롭게 등장하는 복음주의자들에게 가장 잘 어울렸다"며 "진보주의가 이런 미국의 전통적인 가치에 회의를 갖는 동안, 이들은 미국의 전통적 가치를 더욱 강조함으로서 전후 미국의 애국심과 함께 전후 복음주의의 부흥을 가져왔다"고 전했다.
▲월드비전을 설립한 밥 피얼스 목사. ⓒ월드비전 제공 |
박명수 교수는 "이러한 가운데 밥 피얼스는 1947년 4개월간 중국에서 선교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이 영성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궁핍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중국의 궁핍을 미국 기독교인들에게 알려 그들을 돕도록 하는 중간자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새로운 사명을 깨달았다"며 "그해 10월 미국으로 돌아온 피얼스는 9개월 동안 약 67,000달러를 모금했다. 1948년 다시 중국을 찾은 그는 모금액을 선교사들에게 나눠줬다. 그는 선교사들의 헌신을 미국 사회에 알려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카메라와 필름을 준비해 중국의 실상을 담았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피얼스는 '복음전도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함께 해야 한다'며 전도와 사회참여를 동시에 주장했다. 중국인이 느끼는 물질적 고통과 함께할 때, 그들의 영적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라며 "그는 신학자들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을 삶 속에서 간단하게 설명했다. 칼 헨리가 1947년 '근본주의자들이 사회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을 때, 피얼스는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증거하고 실천했다"고 풀이했다.
또 "피얼스는 중국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기독교와 공산주의 사이의 것으로 이해했다. 그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을 공산주의와 맞서 싸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집단으로 생각했다"며 "그는 중국의 복음화가 공산화를 막는 길이라고 주장하고, 미국 기독교인들에게 복음전도와 함께 가난하고, 병든 중국인들을 위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다. 이것이 바로 월드비전의 씨앗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밥 피얼스는 한때 낙심에 빠지기도 했지만, 친구였던 동양선교회 길보른 선교사의 초청으로 1950년 3월 한국을 찾았다. 박 박사는 "교회사 관련서적들은 밥 피얼스가 1949년 한국에 처음 왔다고 기록했지만, 이때 처음 온 것"이라고 했다. 밥 피얼스는 자신의 일정을 한국인들에게 완전히 맡기고, 한 달간 당시 한창이던 구국전도 운동에 함께했다.
박 박사는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 복음주의의 새로운 흐름이었다. 이전의 분리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 주류 교단에서도 협력자를 찾았고, 해외에서는 오히려 주류 교단과 손을 잡고 활동했다"며 "이는 미국 복음주의가 본토보다 해외에서 더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이유가 됐다. 미국에서 밥 피얼스는 변두리 인물이었지만, 한국에서 세계적인 부흥사로 소개되면서 미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각됐다"고 전했다.
▲1957년 열정적으로 설교하는 밥 피얼스 목사(왼쪽)와 통역하는 한경직 목사의 모습. ⓒ월드비전 제공 |
박명수 박사는 "서울 집회 후 피얼스는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한국인들은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서 기독교인들이 죽은 것처럼, 한국이 공산화된다면 기독교인이 그 첫 번째 표적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며 "이승만은 아직 공산주의자들이 한국 정부를 무너뜨리지 못한 이유는 전국적으로 일어나는 놀라운 영적 부흥 때문이라면서, 피얼스에게 이런 사역을 지속해 줄 것을 요청했다. 피얼스와 이승만은 정신적으로 동질적이었다"고 했다.
이후 밥 피얼스가 미국으로 돌아간 사이에 6.25 전쟁이 발발했다. 이는 중국 공산화 등으로 공산주의의 위협에 주목하던 많은 미국 기독교인들에게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 이때 빌리 그래함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세계 어느 지역보다도 인구비례상 한국은 기독교가 많음. 우리는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음'이라는 전보를 보냈다. 이에 트루먼 대통령은 6월 30일 한국에 지상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빌리 그래함은 아마 피얼스로부터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트루먼은 한국에 대한 지상군 파견 결정이 대통령 재임 중 히로시마 원폭 투하보다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회고했다"며 "트루먼은 7월 14일 빌리 그래함을 만나기로 했는데, 그 직전에 각의에서 6.25 전쟁을 위해 의회에 10조 달러의 예산 신청을 결의했다"고 했다.
박 박사는 "이같은 상황 가운데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는 한국을 돕는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밥 피얼스의 모금활동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그가 만든 영화 '38선'이었다. 이 영화에서는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한국 유일의 나병 요양원과 함께 순교와 시련 가운데 탄생한 한국교회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며 "이렇게 한국을 위한 모금이 구체화되자, 피얼스는 한국을 돕는 조직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월드비전"이라고 밝혔다.
6.25 약 석 달 후인 9월 22일, 美 오레곤주 포틀랜드에서 세워진 월드비전은 '환상(비전)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잠 2:18)'는 구절에 기초했는데, 사실 밥 피얼스가 속한 YFC의 집회 이름이었다. 피얼스의 월드비전은 YFC의 복음전도와 반공정신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1950년대 초, 밥 피얼스 목사가 한국의 넝마주이 소년들 앞에서 풍선을 불어주고 있다. ⓒ월드비전 제공 |
월드비전은 '복음주의적 교파연합적 선교봉사기관으로서, 이미 설립되어 있는 복음주의적인 선교기관을 통해 긴급히 도움이 필요로 하는 세계의 요구에 응답하기 위한 조직'이라고 정의됐다. 초기 창립정신에 나타난 월드비전의 성격은 △복음주의적 초교파 운동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여러 복음주의적 선교단체와 손을 잡고 활동 △긴급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단체나 개인에게 즉각적이고 신속한 응답을 하기 위한 조직 등이었다.
박명수 박사는 "원래 한국에 있던 선교단체를 돕기 위해 미국에서 만들어졌던 월드비전은, 전쟁이 확대되면서 고아들을 돕는 일들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며 "특별히 불쌍한 전쟁 고아를 미국 기독교인들에게 소개해 일대일로 연결하는 프로그램은 큰 성과를 거뒀고, 특히 모금에 있어 엄청난 성과를 거뒀다"고 전했다.
피얼스는 1950년 10월 전시의 한국에 신문기자 자격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민간인이 갈 수 없는 최전선까지 다니면서, 전쟁 상황보다 전쟁으로 고통당하는 고아와 과부들에게 더 관심을 가졌고, 그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이를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박 박사는 "피얼스는 자신의 성경에 '하나님의 마음을 찢는 것과 함께 나의 마음을 찢게 하라'는 구절을 적어넣었고, 이는 후일 월드비전의 모토가 됐다. 그는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웃는 사람과 함께 웃었다"며 "밥 피얼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북미 복음주의자들 중 그보다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감을 더 많이 일깨운 사람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했다.
▲밥 피얼스 목사(오른쪽)가 1950년대 6·25 전쟁으로 다리를 잃은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월드비전 제공 |
끝으로 그는 "밥 피얼스와 월드비전은 세계대전 후 미국 복음주의의 산물이다. 이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변화하는 시대에 복음을 설득력 있게 전하는 등 상당한 융통성을 갖고 있었다"며 "그들은 대중 오락 매체의 전달 방법을 적극 수용했고, 특히 밥 피얼스는 필름을 크게 활용했다. 또 공산주의로부터의 기독교 보호를 시대적 과제로 삼았다. 이는 냉전시대 미국의 방향과 일치하면서 큰 호응을 얻었다"고 정리했다.
또 "북한 공산정권의 위협에 직면한 한국 기독교는, 기독교와 반공의식으로 무장한 밥 피얼스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됐다. 이는 월드비전이 한국에서 뿌리내리는 중요한 이유가 됐다"며 "피얼스가 함께 사역한 동양선교회, 북장로교선교회, 한경직 목사 등은 중국과 북한에서 실제 공산주의의 위협을 경험한 이들이었다. 특히 피얼스는 북장로교 선교사들과 한국 기독교의 대표 지도자인 한경직 목사와의 협력을 통해 한국 기독교에 깊숙이 뿌리를 내렸다"고 평가했다.
논찬을 전한 양용희 교수(한국비영리학회 회장)는 "지금까지 월드비전과 밥 피얼스 목사의 사역이 기독교 복음과 구호활동이라는 단선적 시각에서 조명되었다면, 본 논문은 월드비전의 태동을 분석하면서 한 개인의 인물 중심 시각에서 역사적 배경을 통해 조직과 사람들의 이념과 관계를 역사적 맥락을 통해 바라봤다는데 의미가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