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교단에서 실시하는 인종문제 Workshop에 참여하면서 들었던 얘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교단에서 고위직을 맞고 있는 한분의 간증이었는데 자신은 흑인으로서 백인 동료들에게 차별받지 않기 위해서 많은 경우에 정장 차림을 하고 빈틈을 보이려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피부색 외에는 다른 것으로 흠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 그만큼 매사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 하나로 수많은 흑인들이 겪어야 했던 인종차별의 상처와 아픔을 나름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인종차별이란 자신들이 인식하고 있거나 믿고 있는 인종을 근거로 다른 인종을 차별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인종 차별주의 또한 다른 인종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과 다르거나 자신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통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인종차별이 앞서가는 문명사회요 다인종 전시장으로 일컬어지는 미국의 자화상이 되고 있음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인종차별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는 현실을 보면서 미국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흑백간의 인종차별의 현주소와 이에 대한 성경적 대안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미국의 역사에 나타난 인종차별
처음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백인들은 원주민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농사를 시작했으나 이러한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자 백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붙잡혀 온 노예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 관리하기 위해서 인종 차별 정책을 도입하기에 이른다. 1863년 노예해방 선언이 발표되었지만 여전히 흑인에게는 선거권조차 보장해주지 않는 등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움직임은 1876년부터 1965년까지 시행되었던 Jim Crow laws로 대변되고 있다. 이 법들로 인해서 옛날 남부 연맹에 있는 모든 공공기관에서 백인들과 흑인들을 합법적으로 분리하는 정책을 허용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흑인들은 백인들보다 경제적 후원이나 주거지를 선택하는 면에서 열등한 대우를 받게 되었고 경제, 교육, 사회 전반에 걸쳐서 불평등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법의 실제적인 예로 공립학교, 공공장소, 대중교통에서의 인종 분리나 화장실과 식당 등지에서의 흑백 격리를 들 수 있다. 심지어 미국 군대 안에서도 백인과 흑인은 철저히 분리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가운데 1863년 링컨이 노예해방을 선언하게 되는데 그 요지는 이와 같다. "1863년 1월 1일부터 미합중국에 대하여 반란 상태에 있는 주 또는 어떤 주의 특정 지역에서 노예로 예속되어 있는 모든 이들은 영원히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육해군 당국을 포함한 미국 행정부는 그들의 자유를 인정하고 지킬 것이며 그들이 진정한 자유를 얻고자 노력하는 데 어떠한 제한도 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언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인종 차별은 지금도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초기 유색인 이민자들이 영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공공연히 차별정책을 시도하는가 하면 동양인들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퍼트렸다는 음모론을 앞세워 그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증오범죄까지 공공연하게 자행하고 있는 현실이다.
주지하는 것처럼 1955년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된 로사 파커 사건은 흑인 인권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1960년대는 미국 인권운동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데 마틴 루터 킹 목사가 20만 군중 앞에서 행했던 연설은 이의 상징이 되고 있다. 당시 인종차별에 대항하는 두 흐름이 있었는데 킹 목사는 흑백평등의 기치를 주장한 반면 말콤 엑스는 "검은 것이 아름답다" 하면서 흑인의 자긍심을 일깨우는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을 토대로 케네디 대통령은 고용 부문에서의 인종 차별을 금지한다고 발표했고 뒤이어 존슨 대통령은 공공장소, 고용, 선거에서 인종차별을 금지한다는 행정명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미국 인종차별의 현주소
2015년 6월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있는 찰스턴 (Charleston)에서 최악의 인종혐오 범죄가 발생했다. 한 흑인교회에 괴한이 난입해서 당시 성경공부를 하던 교인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인종주의와 백인우월주의에 심취해 있던 가해자는 인종 전쟁을 시작할 목적으로 총격을 가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모두 9명의 교인이 사망 했는데 그 여파가 들불처럼 번지면서 인종주의를 상징하는 남부 연합기 등의 상징물을 철거하는 운동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흐름에 발맞추어 버지니아주 샬러츠빌 (Charlottesville)시는 2017년 8월 12일 해방공원 (Emancipation Park)에 있던 남부 연합의 로버트 리 장군의 동상을 철거하기로 한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우상이었던 그의 동상이 철거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KKK 단원을 비롯한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버지니아대학에 모여들었다. 이때 법원은 수정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인용하면서 그들의 시위를 허가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백인 극우세력과 이에 대항하는 진보세력의 본격적인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극우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얼굴을 드러낸 채 백주 대낮에 대규모 시위를 진행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증오와 편견 폭력을 규탄하면서도 극우 인종 차별주의자들과 진보 진영을 함께 비난하는 양비론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이후 나타난 여론의 흐름을 보면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대세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은 계속 진행형인데 최근에는 흑인을 비롯한 소수 인종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선거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형국이다. 샬러츠빌 사태 이후로 극우 백인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미국이 이념전쟁의 수렁으로 깊이 빠져들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인종차별에 대한 성경의 교훈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 건국 초기의 지도자들이 인종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 미국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유럽에서 건너 온 청교도들이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원주민들과 노예로 유입된 흑인들 그리고 자신들과 같이 꿈을 안고 이주한 유색인종까지 차별하는 일들을 공공연하게 저질렀던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데 지금도 인종 차별을 부추기거나 이러한 정책에 동조하는 교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은 자신들의 의를 앞세우는 죄를 범하게 됨으로서 성경에서 얘기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과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창세기 1장에서 보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 받았기에 인종 차별은 말이나 생각 행동을 통해서 이러한 진리를 거스르는 일이다. 인종 차별은 창조주 하나님의 율법과 성품을 거스르는 일로서 분명 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웃에 대해서 욕을 하거나 누군가를 함부로 대하고 지칭하는 일은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는 일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신다고 했는데 이는 그분이 나라나 인종을 근거로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인종이나 국적을 근거로 이웃을 차별하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죄가 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분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면서 갈라디아서 6:15에서 이와 같이 가르치고 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자 뿐이니라." 여기서 할례나 무할례는 인종이나 종족의 차이를 뜻하는 표현으로서 인종 차별은 복음을 전할 전도자에게 있어서 전혀 무익한 것임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펼쳐질 세상의 징조를 보면 인종이나 종족 그리고 나라 사이의 갈등이나 반목으로 말미암아 종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저질러지는 인종 차별이 오직 은혜로 인해서 구원에 이른다는 복음의 핵심적인 원리를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에 기독교인들 가운데 인종차별을 조장하며 동조했던 사람들이 있다면 회개를 통해서 돌이킬 수 있어야 한다. 이제는 교회마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진정한 형제사랑을 실천함으로서 인종차별의 악을 근절하는데 앞장서야 한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