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성추행 문제를 다루는 기사들을 보면서 필자가 느껴온 바가 있다. 성범죄 사실이 드러난 후임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에게 '제자를 사랑한 스승'이니 '영적 지도자'니 '담임목사'니 하는 신성한 신분적 명칭을 붙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 자체는 논리적으로 성립이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신분적 명칭의 허용은 그 신분이 보유하고 있는 가치와 그래서 당연히 해야 하는 행위들과 어느 정도 부합되어야 성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신분은 성추행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 되는 셈이다.
이런 비논리적 사고 때문에 한국 기독교의 진리가 큰 훼손과 비방을 입고 있다.
또 굳이 이런 명칭을 붙이려면 가해자의 책임을 묻는 질책용으로 사용해야지, '눈 감아주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 자체가 목양에 대한 기본 개념 조차 없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1. 거짓 선생
성경은 '거짓 선생들'에 대해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벧후 2:14)"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성추행을 저지른 영적 지도자들은 비록 겉으로는 정통 보수신앙의 교리를 믿는다고 하나, 영적으론 미혹된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는(벧후 2:9) 상태로 봐야한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로 선한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6)".
또 에스겔서 34장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있을진저...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리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4절)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며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5절) ...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 양의 무리가 노략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것은 목자가 없음이라(8절) ...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의 무리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를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식물이 되지 않게 하리라(10절)".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신정 왕국 체제인 이스라엘 정치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과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비유하여, 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을 고발하고 경고하신다.
참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백성들을 인도하도록 목자의 사명을 위임하신 것을 뜻하는 말씀으로, 오늘날 목회자들에게 더욱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도자들에게 원하시는 내용은 무엇인가?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고 쫓긴 자를 돌아오게 하고 잃어버린 자를 찾는 일이라고 하신다.
그러면 이런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좋은 신학교 간판과 탁월한 대인관계 스킬인가? 그렇지 않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교인의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고 영적 부모의 심정으로 도우고자 하는 연민의 심정과 실제적으로 신앙 성장을 도울수 있는 영적인 능력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을 보면, 너무도 목자의 본질과 동떨어진 경우가 있는 것을 위의 말씀은 지적하고 있다. 양을 먹이는 대신 오히려 양의 것을 취해, 자기만 먹고 있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자기만 먹이고 있는" 속 시제엔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습관적 행동을 말한다. 이들은 연약한 자의 약점을 간파하되, 그것을 도리어 자신의 '이익의 재료'로 삼아 양의 '생명'을 위협하고 불안하게 하고, 죄의 길로 유인하거나 절망이나 상처를 주는 비상식적인 목자들에 해당된다. 성추행 목사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와 같은 목자들이 저지르는 행동을 하나님은 '강포'로 표현하고 계신다. 강포는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를 누르고 수탈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단순히 양들을 강하게 하지 않고, 고쳐주지 않고, 싸매지 않고, 돌이키지 않고, 찾지 않은 것이라고만 질책하지 않으시고, 목자가 강포로 행하였다고 까지 표현하신다.
"너희는 강포와 겁탈을 제하여 버리고 ... 토색함을 그칠지니라(에스겔 45:9)".
요컨대 목자가 자기 임무와 책임을 충실히 수행치 않는 결과로서 양들을 다른 마귀의 밥이나 노략거리로 내어준다는 뜻만이 아니라, 목자 스스로 이미 양들을 식물로 삼는 들짐승, 즉 주범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양들을 들짐승 같은 목자들의 입에서 건져내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니, 이 얼마나 엄중하고도 예리하게 목자의 책임감을 일깨우는 말씀인가?
기득권을 가진 지도자가 강포를 행할 때, 그 피해는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피해자가 속한 가정과 교회 환경 전체에까지 깊숙히 두고두고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기에 주님은 이런 명목상의 목자요 거짓 목자를, 양들을 사단에게 내어주는 '도적'이요 '강도'요 '삯군 목자'라고 명명하셨다(요 10:8-13).
이들은 바탕에 있어 과도하게 이기적이고 계산적이고 정치적이고 명예욕에 눈이 먼 자들로서, 양심에 찔림이 없는 자들인 것이다.
목자로서의 자질과 성품은 눈에 보이는 외적인 자격이나 조건과는 상관 없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자격과 내면의 영적 상태와 직결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해자 측에선 주님이 맡기신 영혼에게 강포를 행한 죄를 회개하고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해 피눈물을 흘리며 중보기도를 해야할 때인데도, 피해자들을 질책하거나 죄의식을 심어주거나 시사적으로 저주성 발언을 하기에 급급하다면, 이는 근본적인 목회자로서의 부르심이나 사명감에 큰 하자가 있는 것이고, 복음주의적 목양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고 느껴진다.
2. 세상 법정의 송사
성경이 신자들 간 세상 법정의 송사를 금한 것은, 어찌 이 세상에 살 동안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과 주님 재림시 주님과 함께 천사와 세상을 다스릴 의롭고 고상한 성도의 신분인 신자가(계 20:4), 세상 일 하나 조차 지혜롭게 다스리지 못하여 영적으로 불의한 불신자인 세상 사람들 앞에 굳이 믿는 신자끼리 고발을 하는 추태를 보이며 세상 사람들의 지혜를 구해서 해결해서야 되겠느냐는 간절한 호소의 말씀인 것이다(고전 6:1-8).
더구나 지금도 이슈가 되는 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새삼 더 깨닫게 되듯, '하나님의 법'은 '세상의 법'이 미치지 못하는 근원적인 정의와 사랑의 지혜를 담고 있는 바, 심오한 차원의 경륜을 내포한다.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법령(unjust laws)'을 만드는 자에게 화가 있을 거라고 하셨다(사 10:1). 차별 금지법의 동성애 조항이 능동적 의미의 불의한 법령이라면, 목회자 성범죄에 관한 교단의 미온적인 규제는 수동적 의미의 불의한 법령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현재 미주 한인 교계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 교계의 현실은 어떤가? 도리어 교회의 성추행 문제가 세상 법정으로 가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복음 전파를 막고, 교회를 무너지게 하고, 성령을 거역하게 하고, 서로 불행해지고 후회하는 인생이 되어가는 추세이지 않은가? 왜 그런가?
바울이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 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고전 6:5)"라는 염려대로, 현재 교회나 교단에서의 치리가 세상 법보다 공의롭고 지혜롭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불의의 온상을 만들어온 편이기 때문에, 말씀을 뒷받침할 만한 효력을 상실한 것이다.
노회나 총회에 성폭력에 관한 지침이나 법조항이 없고, 가해자의 범죄를 공개 사과는커녕 은닉하거나 징계 없이 사직서만 수리해 덮어버리고, 피해자에 대한 우선적 보호 조치 없이 오직 가해자의 위신 관리에만 급급하고, 피해자와 그의 가족은 안중에도 없이 가해자 가족만 염려하고 있으니, 결국 세상 기준보다 의식이나 도덕 수준이 형편없이 낙후된 것이라 평가받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의 치리가 주님의 심판에 맡기는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실정이다. 목회자의 성범죄는 그간 형편없는 교계의 치리로 인해 모방 범죄가 확산일로를 달렸다.
그러므로 부득불, 성경의 뜻을 알면서도 차선책으로 세상 법정에 의뢰하지 않고는 안 되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오게 된 것이다.
3. 가해자에 대한 교인들의 질책
가해자를 질책하거나 모욕하거나 회유하는 교인들의 행동은 '영적인 일'에 대한 인식이나 분별이 없기에 나온 것이다. 가해 목사 측의 경우도 '영적인 통찰력'과 '영적 책임감'이 없으면 비슷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대개 그루밍 성범죄를 교회 사회에서 세상의 로맨스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예가 적지 않은데, 그런 이들은 영적 세계에 눈이 감겨 있다고 보아야 한다.
목회자의 성범죄가 일반 성범죄와 차원이 다른 이유는, 일반 성범죄의 피해 외에도 가해자의 신분이 지닌 고유하고 본질적 가치에 정면 역행해 피해자의 '영을 노략'한 것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한 마디로 '영적인 덫'에 걸려든 것이므로, 그 심령과 교회의 피해가 심각하게 위중한 것이다.
교인들이나 가해자 측이 피해자를 자신들의 딸이나 여동생이나 아내라고 생각한다면, 이와 같은 반응을 할 수 없을 것이다.
4. 가해자 교회에서 피해자 측에 용서와 감사를 설교하는 경우
성추행이나 성폭행 피해자는 가해자 측이 바라는 것처럼 피해자 측에서 그렇게 쉽게 '용서와 감사(?)'가 되고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요구는 일반 상식에도 부합하지 않고,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는 복음주의 신앙과 동떨어진 양심이며, 오히려 폭력적인 태도이다.
가해자 측의 공감능력 부족은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에 대한 성찰이 절대 부족하고 자기 앞가림에만 너무 급급해서일 것이다. 어떤 위기 상황에서야말로 그 사람의 진면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말씀과 양심이 없어서 오히려 없는 것만도 못한 목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존재하지 않는 목자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목자가 없다고 단언하신 것이다.
아무리 겉으론 번지르르해도 우리 누구나 심령 속에 말씀의 생명력이 역사하지 않으면 내적 공허와 불안감에 휩싸이고, 자연히 말씀을 먹여야 할 양들에게 갖가지 모양으로 기대고 그들을 이용하여, 어느새 세속적인 이득과 재미를 보는데만 관심이 쏠린 삯군 목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다윗의 신조'의 잘못된 적용
과거부터 필자를 포함한 보수 신앙인들은 사울 왕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므로 반복해서 자신을 죽이려 했어도 해하지 않았던 '다윗의 신조'를 본받아, 목회자의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굳건히 믿어왔고 남에게도 늘 강조해 왔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지난 근자에, 필자는 성범죄 영역에 있어선 '다윗의 신조'를 적용시켜온 교계 내의 풍토가 모방범죄 등 심각한 폐단을 가져온 사실을 깨닫고, 다시 한 번 성경 말씀의 의미를 살피게 되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따른 결과가 '선한 열매'가 아니라면, 그것엔 말씀에 대한 이해와 적용에 있어 뭔가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윗은 왕이었으므로, 오늘날 목회자는 신분상 다윗보다는 사무엘 선지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다윗 왕의 신앙을 본받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간혹 다윗의 위상과 자신의 위상을 동일시하는 이상한 목회자들이 다윗 왕의 범죄까지도 자신에게 가능성을 열어두고 성추행을 합리화하려는 경우가 있다면, 이야말로 난센스 중 난센스다.
성경에 나오는 범죄는 방지를 위해 기록된 것이지 모방을 위한 것은 아닐뿐더러, 다윗의 경우는 왕의 신분으로서 여러 여성을 아내로 삼고 책임질 수 있는 제도적 용인이 있었기에, 비록 방법에 있어 큰 범죄를 저질렀지만 소위 말하는 상습적인 여성 편력을 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요즘에도 자신을 '왕'처럼 생각하는 일부 목사들이 다윗 왕의 '빽'을 믿고 이단 교주들 처럼 여성 편력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되고, 또 이런 목사를 '싸고도는 목사들'이 되려 피해자에게 '다윗의 신조'를 주문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한인 교회 이면이 지닌 코믹한 참람함이다.
오늘날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목사는 사역의 역할에 있어 지도적 위치에 있지만, 성도들 또한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므로 마땅히 해하지 않아야 할 대상이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한 것은 정적들을 제하려는 정치적 욕망 때문이었지만, 오늘날 목사가 교인을 (영적으로) 죽이는 것은 탐욕적인 음심 때문에 방탕하게 약자에게 강포를 행하는 것으로써, 하나님 형상의 회복을 도와야 할 교인의 전 존재에 대한 비인격적이고도 도구화적인 만행에 해당한다.
현실에 있어 사울보다 뛰어난 장수인 다윗이 장인인 사울을 해하지 않을 수는 있었어도, 영·혼·육 간 양육이 필요한 교인에게 되려 가해 목사에 대해 용서를 주문하는 것은 실로 '멘붕'적 처사다.
모름지기 교회는 피해 교인에게 '다윗의 신조'를 주문하기 전에, 가해 목사에게 먼저 '다윗의 신조'를 주문하는 것이 바른 순서일 것이다.
맺음말
같은 신학교를 나와도 사람마다 신앙 수준이 천차만별일 것이다. 어떤 이가 영성이 깊다는 누구와 대학 동창이거나 같은 교단이거나 같은 선교팀이라거나 같은 단체에 속한다고 해서, 그 어떤 이의 영성을 보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의외로 자신의 성취욕이 지나친 나머지 '한 영혼에 대한 관심'이 없는 목회자가 실제 많은 것이 현실이다. 유독 선천적으로 지나치게 이성을 좋아하는 성정을 가진 이들은 반드시 목양을 그만두길 정중히 권하고 싶다.
목양에의 소명에 대한 뚜렷한 확신이 없다면, 목양이 아니고도 주어진 은사대로 사역함으로써 공헌할 길이 얼마든지 있지 않겠는가?
꼭 교회를 해야만 목사라고 떳떳하게 불림받고 인정하는 교회 사회적 풍토라면, 개혁교회 식 인식 전환이 필요할 듯 하다. 앞으로 우리 자녀 세대들을 위한 안전한 믿음의 환경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목양 자격이나 역량은 신학교나 교단이나 선교단체나 그 어떤 소속의 직함보다는, 교회 안에서 가장 잘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런데도 성추문 같은 일이 생기면 가해자의 교회 안 생활을 전혀 모르는 바깥 목사들이 교회 밖에서의 유대만 가지고 가해자를 잘 안다고 착각하거나, 바깥 일에 대한 필요성 때문에 무턱대고 가해자를 필요 이상 싸고 돌거나, 동정심을 너무 쉽게 남용함으로써, 가해 당사자의 영적 퇴행은 물론 피해자에 대한 가해적 파급 효과가 가중돼 더 교회 사회를 멍들게 하고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될 수 있다.
미주 한인 사회는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 문화국가 속에 있으면서도, 이민자들의 특성상 현재 한국 사회보다 수십 년 뒤떨어진 재래 문화적 특성을 띄고 있다.
그러므로 미주 한인 교계도 앞으로는 성범죄 가해자 측과 더 이상 통속적 정치인처럼 모의를 주고 받으며, 단체나 조직의 갑옷을 입고 단체나 조직의 힘으로 가해자를 살리고 피해자를 죽이려고만 들지 말고, 교단 차원에서 성폭력에 대한 징계 조항을 철저히 세우고, 가해자로 하여금 진솔하게 말씀만 붙들고 직접적으로 피해자와 피해 교회 앞에 자신의 잘못을 정직하게 사과하고 용서를 빌도록 권유해야 한다.
용서를 비는 것은 남이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니다. 가족이나 친구나 다른 대표직의 목사가 대신 하는 것도 아니다. 용서는 가해 당사자가 직접 피해 당사자와 회중 앞에서 해야 옳은 것이다.
깨끗한 양심과 말씀에 따른 행동을 최대 밑천으로, 최우선으로, 최전방으로 삼는 목사와 그런 목사들의 회가 절실히 요청되는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