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과 은혜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우리 믿는자들은 세상속에서는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감동은 세상이 이해되는 방식으로 설득시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가 없기에 그들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감동은 분명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오도록 만드는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설득시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고, 우리 믿는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감동만으로는 절대 사람들의 어려움과 환란을 이기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아픔이나 상처를 바르게 회복시킬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 믿는자들을 고난과 환란에서 이기게 할 수 있습니다. 아픔과 상처를 온전히 회복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세상이 주는 방식인 인간적인 감동으로만 사람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습관적으로 위로를 전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라고 위로를 전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육체적으로 쉬게 되면 마음이 안정될 거라며 위로를 전합니다.
분명 이러한 위로가 힘들고 아픈 자들에게 큰 감동이 됩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러한 위로들도 물론 필요합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쳐버려서는 절대 안됩니다. 감동만 주는 일로만 그쳐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힘들고 아픈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만 살아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감동과는 달리 우리가 어떻게 해야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행위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하셨던 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는 변하지 않고 영원합니다.
근데 이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만 흘러옵니다. 그 말씀이 아픈 우리의 마음과 환란 가운데 있는 우리의 삶 속에 흘러오게 될 때에만 우리는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씀속에 있는 하나님의 위로방식이 세상이 주는 위로 방식과는 다르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은 반드시 우리들의 상처와 환란이 사라져야만 문제가 해결 된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하나님 앞에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살아가야 할 목적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 때에 우리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상처들과 아픔들이 사도 바울의 가시처럼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망가지고 어그러진 인생 속에 하나님의 위로방식인 바른 은혜를 안다면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길 수가 있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알고보니 참 많은 인생들이 아픕니다.
겉으로는 다들 행복해 보이고 기쁘게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아픔 하나 이상은 가지고 살아갑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멀리서는 희극이지만, 가까이는 비극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여전히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삶이 더욱 더 심각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여전히 아픈 상처로 인해 잠 못 이루고, 변화되지 않는 상황으로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고, 반복되는 실패와 실수로 인해 패배감과 정죄감에 사로 잡혀 있으며, 무너져 버린 인간관계로 인해 홀로 외로이 버티는 모든 이들에게,
이 하나님의 은혜가 진심으로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 은혜만이 우리를 온전히 회복시킵니다. 이 은혜로만 우리는 살수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고전 16: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