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왜 다메섹으로 갔을까요? 바울 시대에 다메섹은 어떤 도시였을까요? 바울 인생의 전환점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과 만남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리고 다메섹을 향하여 갑니다. 그리고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바울 개인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입니다. 나아가 세계 교회사에 큰 의미를 갖는 사건입니다. 영국의 신학자 죤 스토트는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울의 체험은 교회사에서 가장 유명한 회심이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스데반 순교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이 돌에 맞는 죽는 것을 당연히 여겼습니다. 스데반과 예수 추종자들이 성전과 율법을 훼파하는 악한 세력들로 보였습니다. 율법과 성전은 바울에게 목숨처럼 소중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바울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는 돌에 맞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가면서 예수님을 전합니다.
예수님께 직접 배우고 예수님에 의해 파송된 사람을 사도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사도'라고 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에 의미를 두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의 체험'을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리고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즉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경험'을 자신의 사도성 근거로 삼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사도권을 강조하는 사도행전은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세 번씩 설명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다메섹으로 갔을까요? 다메섹은 시리아 즉 아람의 수도이자 이 지역 중심도시였습니다. 오래된 도시입니다. 노아의 아들 셈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습니다. 넷 중에 하나가 '아람'입니다. 그가 거주한 지역이 아람 즉 시리아입니다. 다메섹은 시리아 대표 도시입니다. 다메섹도 창세기부터 등장합니다. 아들이 없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자신의 상속자(창15:2)라고 주장합니다.
가나안 7족속 가운데 대표 족속이 아람입니다. 알려진 아람들은 이렇습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창25:20), 야곱의 아내들이 아람출신입니다. 군대장관 나아만도 아람, 특히 다메섹 사람(왕하5:12)입니다. 아람은 이스라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다윗이 소바 왕 하닷과 전쟁을 벌일 때 아람은 소바왕 하닷을 도우려 하다가 다윗에게 크게 패하고(삼하8), 아합은 아람과 전쟁(왕상22)중에 죽음을 맞습니다.
구약 선지자들은 다메섹을 이방의 대표로 간주합니다. 이사야는 다메섹 멸망을 경고(사17:1~3)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다메섹의 심판을 예언(렘49장)했고, 아모스는 다메섹의 죄를 지적(암1:3~5)했습니다. 스가랴는 하나님 말씀이 이방 땅에도 있음(슥9:1)을 가르치면서 하나님 은혜를 선포합니다.
다메섹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130K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바울 시대에 걸어서 엿새가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당시 다메섹은 국제적인 도로망(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또 다메섹에는 안티 레바논 산맥에서 흘러 내려오는 나아르 바라다(Nahr Barada,아미나)강과 도시 남쪽에 나아르 엘 아와이(바르발)강이 있었습니다. 이 강들이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보다 더 맑다며 분노했던 강들(왕하5:12)입니다. 이 두 강도 다메섹에 중요한 교통의 맥이었습니다.
이렇게 다메섹은 정치와 경제 중심도시였고, 나아가 종교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주전 9세기에 다메섹에는 하닷 신을 숭배하는 아람신전이 있었습니다. 하닷은 폭풍과 다산의 신으로 다메섹 수호신이었습니다. 로마정부는 주후 1세기에 아람신전에 쥬피터 신전을 혼합하여 더 큰 신전을 만들어 다메섹을 로마정부 종교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기독교가 성장하면서 주후 4세기에 하닷과 쥬피터 신전은 성 요한 성당이 되었고, 이슬람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8세기 초에는 그 자리에 이슬람 모스크가 들어섰습니다.
다메섹에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울을 안수하여 눈을 뜨게 하고 새로운 사역의 비전을 전달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세 아나니아가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5장에 등장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에 아나니아가 있습니다. 23장에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한 제사장 아나니아가 있습니다. 그리고 9장에 다메섹에 거주했던 제자 아나니아가 있습니다.
바울을 만난 아나니아를 기념하는 아나니아 기념 교회가 다메섹에 있습니다. 다메섹 성벽에 바울이 광주리를 타고 도피한 것을 기념하는 바울 기념 교회도 있습니다. 다메섹은 바울이 핍박하러 갈 때부터 신앙인들이 많았습니다. 변화된 바울의 적극적 전도로 다메섹 교회는 큰 부흥을 경험하였습니다. 한동안 다메섹은 기독교 도시였다가 이슬람에 정복당합니다.
A.D. 7세기 후반 '다메섹의 요한'이라는 걸출한 교회 지도자가 다메섹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전통신앙론"이란 책을 남겼습니다. 동방교회 신학을 집대성한 책인데 서방교회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과 견줄 만한 작품입니다. 요한은 다메섹이 강력한 이슬람 영향권 아래 있을 때, 다메섹에서 성장하여 건실한 영적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다메섹 교회는 동방교회 신학과 신앙을 지켰던 기독교 변증가 요한을 배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