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고 탁월한 대학 도시였습니다. 자녀를 양육하기에 안성맞춤인 교육 도시였지만 바울의 부모는 바울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이주합니다. 그들은 바울의 더 좋은 교육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당대 최고의 랍비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우게 합니다.
성경에는 두 사람의 '가말리엘'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브다술의 아들 가말리엘로 민수기에 등장합니다. 다른 가말리엘은 사도행전 5장(34절)과 22장(3절)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의 스승 가말리엘입니다. 사도행전22장에서 사도바울은 자신이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성장했다고 자랑합니다.
사도행전에 두 번 언급되는 사도바울의 스승 가말리엘은 산헤드린 공회를 움직일 수 있었던 영향력 있는 지도자입니다. 유대인의 전승과 역사책이 전하는 가말리엘은 대 랍비(Arch-Rabbi) 혹은 최고의 랍비라는 의미의 '라반(Rabban)'이라는 칭호를 가진 최초의 랍비가 가말리엘입니다.
가말리엘은 힐렐 학파를 창시한 바리새인 지도자 힐렐의 손자입니다. 힐렐은 탁월한 랍비였습니다. 미쉬나와 바벨론 탈무드에 의하면 힐렐은 바벨론에서 태어나 바벨론 교육을 받고 성장한 후에 40세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당시 권위 있는 샴마이 학파의 두 랍비-쉐마이어(Shemaiah)와 아브탈리온(Abtalion)-에게 교육을 받고 힐렐 학파를 창시합니다.
120년을 살았던 힐렐은 모세의 삶과 유비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각각 이집트와 바벨론에서 40년 교육을 받았습니다. 또 80세까지 모세는 광야에서 양을 치며 수련을 하고, 힐렐은 랍비학교에서 교육받습니다. 그리고 80세부터 모세는 민족의 출애굽을 인도하고, 힐렐은 민족 교육에 헌신합니다. 힐렐은 당대에 모세가 누리는 영광과 권위를 누린 지도자입니다.
힐렐은 파격적인 여유와 관용으로 율법을 해석했습니다. 힐렐은 약자들의 배려하는데 탁월했었습니다. 예컨대 남편과 사별한 여인의 재혼을 파격적으로 용이하게 했고, 율법적인 안식일 적용과 지나치게 엄격한 십일조를 반대했습니다. 힐렐은 상대인 샴마이 학파에 비해서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학파였습니다. 요컨대 힐렐은 진보적이고 인권의식이 강한 랍비였습니다. 훗날 가말리엘도 힐렐 학파의 최고 랍비로 활동합니다.
역사 자료는 힐렐은 산헤드린 회장인 나시(Nasi)라고 전합니다. 미쉬나는 '힐렐이 죽을 때 율법의 영광도 끝났다'고 전합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전무후무한 힐렐의 권위와 영광은 한동안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오직 가말리엘만이 힐렐의 영광을 능가했다고 합니다. 가말리엘도 '나시'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힐렐의 아들이요 가말리엘의 아버지가 '시몬'입니다. 역사자료는 힐렐의 아들 시몬도 나시(Nasi), 즉 산헤드린 회장을 아주 잠시 맡은 후 사임하고 초야에 묻혀 조용히 메시야글 기다리며 살았다고 합니다. 신약의 주석가들은 누가복음 2장25절에 '경건한 사람 시므온'이 가말리엘의 아버지라고 주장합니다.
랄프 하비는 대학자 힐렐의 아들이요, 대 랍비 가말리엘의 아버지인 시몬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추적합니다. 랄프 하비는 당시 유대 지도층에서 누가복음 2장에서 언급되는 시몬의 모습에 실망하고 그에 대한 모든 기록을 삭제했다는 주장을 합니다. 랄프 하비 등 몇몇 학자는 누가복음 2장의 시몬이 가말리엘의 아버지라고 주장합니다.
학자들은 가말리엘은 철저한 바리새인이요 존경받는 랍비였지만 아버지 시몬의 영향을 받아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5장에서 사도들에게 유리한 리더쉽을 발휘했던 것도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동방교회 전승에 의하면 가말리엘은 바울, 스데반, 니고데모을 가르쳤고 말년에 자신도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 가말리엘은 니고데모와 함께 스데반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스데반의 죽음을 애도하는 니고데모와 가말리엘'이라는 명작을 남겼습니다.
죠세푸스는 가말리엘이 예루살렘 멸망 18년 전에 사망했다고 전합니다. 로마로 압송되던 바울이 난파당한 때와 비슷한 시점입니다. 아람어로 번역된 구약 성경 탈굼(Talgum)의 저자였던 온켈로스(Onkelos)가 가말리엘의 제자였는데, 온켈로스가 왕의 장례식 수준의 성대한 장례식을 준비했고, 최고의 스승 라반(Rabban) 가말리엘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전해집니다. 역사가 죠셉푸스는 가말리엘과 가말리엘의 손자 시몬이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특히 시몬은 훗날 초대교회 중요한 지도자가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바울이 가말리엘의 제자로 자란 것은 섭리입니다. 가말리엘 제자 바울은 유대 사회 영향력과 융통성 있는 해석으로 초대교회 해외선교를 주도합니다. 또 예루살렘회의가 선교적 회의가 되게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나아가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과 가말리엘의 영향으로 구약을 새롭게 해석합니다. 그의 새로운 구약해석의 결론이 '예수가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서신서와 자신의 설교에서 자신의 구약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바울은 유대교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구약을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유대교와 다른 해석이 신약과 기독교의 출발점입니다. 바울은 구약을 기독론과 선교론의 관점으로 해석합니다. 이런 해석을 현대 학자들이 선교적 해석학(Missional Hermeneutic)이라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