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연계된 종교철학은 기독교 자체를 과학적 지식과 유사하게 다루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종교 철학자들 중엔 신실한 신앙심이 있는 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수적으로 우세한 편이다.
신자의 포지션이, 절대적 초월자에게 압도 당한 믿음을 가지고 상호 교류적 관계를 맺는 것이라면, 종교철학자의 포지션은 관찰자의 자세로서 절대자를 대상화 한다.
그러므로 종교철학은 기독교의 믿음 체계(교리)를 개념화 해서 인간의 이성을 매개로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고찰하여 어떤 이론을 도출해 내게 된다.
요컨대 종교 철학은 절대적 객관적 실재인 하나님을 인간의 편에서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나름대로 씨름을 하는 것이다.
시대와 철학자에 따라 표현 양식은 다양해도 그리스도적 신앙을 견지해온 범위에서 전개되어온 흐름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교리적(선험적, 초월적, 존재적)이고 형식적인 죽은 정통파적 신앙에 대한 반발로부터, 현재 내가 있는 역사적 삶의 실존적 현장에서 하나님의 이니시어티브적이고 행위적인 계시로서의 만남을 지향해 온 추세다.
한편 기독교 안엔 개념으로 정리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요소 또한 들어있는데 이는 과학적인 지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독보적이고 고유한 가치를 지닌 종교적 체험에 속한다.
따라서 절대적 실재자와의 상호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개인의 체험적인 영역이 될 때는 판단을 유보할 만한 예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요한계시록의 내용에 나타나는 시공을 초월한 영적인 차원의 드라마틱하고 역동적이고 압도적인 계시의 성격은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 주는 바가 있다.
종교철학은 신자의 사고력을 개발케 하여 신앙의 질을 끌어 올리고 이해의 지경을 넓히는 유익도 주지만, 비 신앙적 종교철학자는 말할 것도 없고 개중엔 이성이란 이름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허무는 것을 감수하고라도 다양한 변주적 사고의 자유로운 발상을 재주인양 즐기는 부류들이 있어 경종을 울린다.
비록 이들의 철학이 정치, 사회나 정신분석 또는 예술 방면에 공헌하는 바가 크다 할지라도 문제는 이런 방면과는 근본 차원이 다른 기독교의 영역에 까지 임의적인 변주적 사고가 마구 적용 되어지고 이들의 현란한 언어적 기만술에 매료되어 이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애매한 입장의 연약한 기독교인들이 많은 것이다.
저들 철학의 공통적인 약점은 죄성에 대한 기본적 개념이 없다는 것이고, 또 저들의 공통적인 실수는 성령의 이해 없이 기독교 신앙의 요체를 무례하리 만치 너무 함부로 헤집는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삼위일체의 신비를 은혜의 감격 속에 깨달을 수 없다면 신에 대한 개념을 자칫 초월적, 상징적, 추상적, 보편적으로만 이해하게 되어 신이 가진 내재적, 실재적,구체적 특수성을 인간적인 것에만 한정시키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영원한 '생명의 다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를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할 때 예수는 그저 신과 사람에 의해 이중으로 소외당한 '지젝'식 '괴물'에 그칠 수 밖에 없음은 당연하리라.
민중신학적 이해가 소외적 괴물 개념을 넘어 예수가 당한 고통적 죽음에 대해 남은 자들이 갖게 된 트라우마적 기억의 재생이 이 후 임마누엘과 부활 신앙을 가능케 했다고 주장하면서 윤리적 정치적 책임의식만을 중점적으로 강조하는 것 또한 문제성이 있다.
왜냐면 이때의 '임마누엘'과 '부활'이란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와 '평강의 왕'으로 오셨던 감격적인 구세주로서가 아닌, 메마른 인위적 기억의 소산물로서, 괴물 예수에 의지하지 않고 나름 홀로 서길 작정하는 지젝식의 괴물적 기독교인의 또 다른 변주적 변(辯)에 지나지 않게 들리기 때문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예를 들어보자.
혹자가 주장한바, '성육신'을 말할때 어떤 이는 '육신'을 '기관 없는 살'로 또 어떤 이는 '살 없는 기관'으로 변주적으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신자인 우리는 '육신'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대로의 '기관이 있는 살'로 이해 하지 않겠는가?
이런 '기관 없는 살'의 정의는 '머리'라는 위계질서 없이 숭숭 구멍난 몸으로 재해석 되고 이것의 수평적 열림에서 차별 없는 공감인 것으로 유도 되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해 '구원'적 의미(머리)를 제하고 '공감'으로만 규정 한다.
즉 전제적인 '성'(본질적 불변의 존재)을 무시하고, 현실적이고 행위적인 '육신'에만 촛점을 맞추어 기독교의 핵심인 '성육신'을 해석한 것인데, 이는 관념론에 대한 반발인 현상학에서 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이 빚은 결과이다.
이런 사조들은 기존의 전제들을 송두리째 없애버리고 그때그때 현실에 나타난 사물이나 사고등의 정황으로부터 현상적 존재의 의미와 가치체계를 만들어가고 심지어 보편원리로 까지 지향하는 방법론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이런 방법이 성경을 해석하는데 분별없이 무지하게 적용되면 범죄자가 받는 형벌도 얼마든지 예수의 십자가로 둔갑되는 길이 열리게 된다.
최근 뉴스거리가 된 황아무개란 자가 페이스북에 올린, "저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인지 부활을 했는지는 관심 없다. 낮은 대로만 향하다가 끝내 죽음까지 받아들이는 한 인간의 강철 정신에 매료되어 있다" 라든가, "골고다 언덕 길을 아무개와 그의 가족이 걸어가고 있다. 가시왕관이 씌워졌고 십자가를 짊어졌다. 검찰개혁 않겠다 했으면, 법무부 장관 않겠다 했으면 걷지 않았을 길이다. 예수의 길이다. 예수가 함께 걷고 계시다."라는 글이 아주 적절한 예이다.
'갑싼 은혜'보다 더 심각한, 신성모독적인 '갑싼 십자가'가 되버린 것인데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자유주의나 진보주의 또 도올식의 성경 해석이기도 하다.
저들이 크리스찬들이 지어야 하는 십자가는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와는 동등 비교가 가당치 않은 은혜의 십자가라는 것을 어찌 짐작이나 하겠는가......
기독교 신앙의 진수가 연민과 연대감과 같은 공감적 사랑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이를 깨닫고 실천하려 노력하는 것만이라도 더할나위 없이 커다란 축복이지만 그러나 기독교 신앙엔 이 외에 반드시 있어야 할 한가지가 더 있다.
그 한가지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과 주님에 대한 '주권(主权, sovereignty)'의 인정이다.
이 전제가 미흡하다면 절대 진리에 대한 믿음의 출발점이 하나님으로 부터가 아닌 인간으로 부터가 되고 만다.
이럴때 기독교 신앙의 믿음에 대해 저들이 걸어오는 시비들 - 인간적 이해의 한계적 믿음이니, 포장된 진리의 상대적 한계니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딴지에 특히 진보적 보수주의라 자처하는 이들은 쉽게 걸려 들게 된다.
다시 설명하자면, 주체와 구조를 상호 배제적으로 설정하는 '라캉'의 구조주의란 것도 기독교 신앙에 적용될때 본질적인 면을 허문다는 면에선 결국 같은 맥락이다.
라캉을 반기는 지젝이나 좌파들에게는 '절대적 진리'란 실재는 존재치 않거나 비존재인 '무'일 뿐이거나 옛 상징이거나 새 상징으로의 변혁을 자극하는 변증법적 과정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신과 인간과의 존재론적 위계질서를 인정치 않으려는 이들의 이론은 순수내재적 체계만을 강조한 나머지 창조자와 피조물의 경계를 허물고 평등한 천지인의 신학을 주장하는 동양적 종교철학과도 아주 코드가 잘 맞는다.
'해체주의'란 것 또한 절대적 실재인 진리에 대해 반기를 드는 것인데, 이 땅에서 절대적 진리의 이름으로 벌어진 온갖 폐단 때문이라고 이들은 주장한다.
요컨대 갖가지 이름으로 포장만 다르지 저들의 공통점은, 자신들이 이해 할 수 없고 믿어지지 않는 영원한 존재적 진리의 거룩한 실재 즉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세상적으로 표현하자면, 끊임없는 실험적 도전을 하는 것이요, 영적으로 표현하자면, 훼손하고 왜곡하고 부인하고 무너뜨리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기독교계나 세상의 온갖 폐단은 끊이지 않고 이어질 것이며 해체적 모음이니 모음적 해체니 파괴적 창조니 창조적 파괴니 하는 온갖 이름으로 절대적 하나님 개념의 중심을 흔드는 작업은 더욱 인기리에 박차를 가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으로 늘 깨어서 분별하여 신앙의 중심을 붙들고 놓치지 말아야 한다.
추운 한 겨울 같은 인생의 밤에도, 우리의 삶 속에 주어진 양떼를 성실히 지키는, 소박하고 꿋꿋한 목자의 가슴으로, 주님의 신비로운 영광의 빛의 감격의 세례 속에서, 낮고 낮은 말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의 여리고 보드란 살결처럼 우리의 영혼의 속살이 정결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한 해의 마무리와 새해가 되길 두 손 모아 기도해 본다.
박현숙 목사(프린스턴미션, 인터넷 선교 사역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