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한국 땅에 1903년에 원산 부흥을 주셨고, 1907년에는 평양 대부흥을 이어서 부어주셨다. 평양 대부흥의 열기가 식어가자 1909년부터 1910년까지 백만인 구령운동이 일어나게 하셨는데 이는 한국교회 성장을 위한 몸부림이었고 민족복음화를 위한 전도운동이었다.
길선주 목사는 1910년에 미국에 있는 조지 매큔 선교사에게 이런 감격스러운 보고를 보냈다.
"나는 당신이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멘.
나는 그 영광의 현시에 대해 하나님께 찬양을 올립니다. 나는 그것을 생각하면 흐르는 눈물을 중단할 수 없습니다. 여기 지금 이 시간에 대학생들과 중학생들이 열정적으로 전도하고 있으며, 초등학생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데 열정이 넘치고 있습니다. 심지어 7살 난 작은 아이들도 모여 돈을 가지고와 전도지와 복음서를 삽니다. 그들은 이것을 거리로 가지고 나가 돌리며 전도합니다. 이 작은 어린 소년 소녀들이 불타는 열정으로 충만한 채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예수의 이야기를 서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개개인에게 가서 팔을 붙잡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간청합니다. 어제까지 불과 3박 4일 동안 약 400명이 그리스도를 새로 영접하였답니다. 그 몇몇 사람은 어린 소년들이 자신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죄를 깨달았다며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찬양합니다! 우리의 소중한 예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그와 그의 은혜의 때에 사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특권인지 모릅니다."
백만인 구령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모두 승리한 일본은 1905년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아가는 을사보호조약에 이어 1907년에 고종황제까지 퇴위시키자 조선은 위기를 극복할 도움받을 길이 이제 하늘밖에 없었다.
기독교인들은 민족의 미래를 위해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고, 이 민족이 사는 길이 기독교에 있다고 확신한 이들은 민족복음화를 염원하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백만인 구령운동이 시작되었다.
1909년 여름 송도에 주재하는 남감리교 선교사들은 이 민족과 한국교회를 살릴 원동력은 영적 각성에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새로운 영적 각성을 위해 7월 12일부터 일 주간 기도회를 가졌다. 이후 9월에 열린 감리교 선교 연회에서 스톡스, 갬불, 리드 등 남감리교 선교사들은 이 나라에 다시 성령의 계절, 그리스도의 계절이 와야 한다며 20만 명의 영혼을 금년에 구원하자는 제안을 했고 남감리교 선교회는 이를 받아들여 "20만 영혼을 그리스도께!"구호를 정하고 민족복음화 운동에 매진하기로 결의한다. 이어 10월 8-9일에 열렸던 복음주의연합공의회는 남감리교의 20만 구령운동을 받아들여 다시 "100만 영혼을 그리스도께!"라고 확장한 전도운동을 결정하고 이 운동을 1910년 10월 9일까지 1년간 매진하기로 정했다. 이 운동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선교사 게일을 위원장으로, 언더우드와 밀러와 벙커를 위원으로 위촉했고, 각 교단에서는 특별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초교파적인 대규모 전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당시 선교사들은 한국의 기독교인을 14-20만 명 정도로 추산했는데 100만 명 구령운동은 목표 달성이 쉽지 않은 전도운동이었다.
백만인 구령운동의 전개와 실천
백만인 구령운동을 통한 민족복음화를 위해 당시의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의 지도하에 특별기도, 전도집회, 축호전도 등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총력 매진했다.
1, 특별 기도회
이길함 선교사를 이어 평양 장대현교회의 담임이 된 길선주 목사는 민족복음화운동을 위해 같은 교회 박치록장로와 함께 조용히 새벽기도를 시작했는데 새벽기도가 광고되자 600-700명씩 매일 모이게 되었고 이 새벽기도회는 사경회와 전도집회가 열리는 곳마다 급속히 한국교회에 확산되게 된다.
이 기간에 또 민족복음화를 위한 금요 심야기도회가 시작되어 정착이 되었고, 어떤 교회들은 주일 준비를 위해 토요일에 모여 기도회를 가진 후 두 명씩 짝지어 마을로 들어가 전도한 후에 주일에 사람들을 교회 예배에 초청했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한국교회는 기도하는 교회, 전도하는 교회로 정착이 되었다.
2, 대중 전도집회
평양과 서울을 비롯해 전국 여러 지역에서 전도집회가 열렸다. 이무렵 마치 외국의 수많은 부흥사들이 입국해 이 운동에 동참하게 된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월버 채프만 목사, 찰스 알렉산더 목사 부부, 로버트 학스니, 데이비스와 그의 어머니, 놀톤 부부, 뉴욕대학의 총장 헬리 맥크레큰, 아더 피어선 박사, 볼티모어 여자대학의 총장 가우쳐 박사 등..., 한국인 목사 가운데서는 길선주 목사와 김익두 목사가 강사로 많이 활동했다.
전도집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결신했는데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렸던 3주간의 전도집회에서는 700명이 결신했고, 평양 남산현감리교회에서는 한주만에 100명이 결신했다.
3, 날 연보(Day Offering)를 통한 축호전도와 전도지 나누어주기
백만인 구령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가장 독특한 전도방법은 날 연보를 통해 엄청난 양의 전도지와 마가복음서를 배포한 일이었다. '날 연보'란 전도운동을 위하여 물질 연보와는 별개로 자신의 시간을 연보 하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신자들 간에 큰 호응을 얻어 평양에서만 천명의 신자가 2만 2천 날을 연보 했고, 황해도 재령에서는 1만 날이 연보 되었다. 이렇게 연보 된 날이 전국적으로 10만 날이 넘었다고 한다. 이런 날 연보에 대해 선교사들이 영문으로 발간했던 월간지 'The Korea Mission Field'에 아래와 같이 실렸다.
"고되고 가난한 생활을 하는 한국 사람들은 도합 10만 날을 전도운동에 바쳤는데, 지난겨울에 사용한 일 수는 7만 6천 날이고 금년 가을에도 수백 명의 전도인들이 가가호호 심방하는 활동과 대 집회에 출석한 구도자들과 개인적 접촉을 위해 한 달을 온통 바쳤다. 3백만 장의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고, 신자들이 돈을 내고 70만 권의 마가복음을 구입해 불신 동포들에게 무료로 배부하면서 복음서를 읽고 예수를 믿으라는 간곡한 권고와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한국인 가정치고 심방받지 아니한 가정이 거의 없을 정도였고, 심방의 결과를 얻기 위해 수 천명의 한국인들이 매일 기도를 올리고 있다"
4, 제1차 YMCA 학생사경회
백만인 구령운동 기간에 열렸던 많은 집회들 가운데 하나가 민족복음화의 열정이 가장 뜨겁게 불타고 있던 젊은 대학생들을 위한 YMCA 학생사경회였다. 1910년 6월 22일-27일 기간에 서울 북부에 위치한 오래된 사찰인 진관사에서 열렸는데 언더우드, 이상재, 김규식, 길선주, 에비슨, 왓슨 등 지도적인 선교사들과 한국인 지도자들이 강사로 나서서 젊은 대학생들에게 민족에 대한 소망과 환상을 불어넣어 주었다. 일재의 침략 앞에 종교들도 연합한 것이다. 스님들은 학생들을 위해 자신들의 방을 양보했고 염불과 목탁소리 대신 찬송과 기도 소리가 절에서 올려졌다.
비록 10개 대학을 대표하는 46명의 학생들이 참석한 소규모의 사경회였지만 한일합방으로 인해 국가의 주권을 빼앗긴 상황에서 탁월한 학생들을 훈련시켜 민족의 미래를 밝히는 등불로 만들려는 소중한 집회였다.
오전에는 선교사들이 이끄는 성경공부와 특강이 열렸고, 오후에는 팀워크를 다지는 다양한 운동경기가 진행되었다. 밤 시간에는 기독교 민족주의에 불타고 있었던 이상재 선생과 김규식 선생의 강의는 대학생들의 가슴에 뜨거운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참가자들은 나라와 교회를 위해 모두 뜨겁게 결단하는 시간을 가졌다.
백만인 구령운동 결산
1, 원산 부흥이나 평양대부흥에 비해 노력에 비해 수적 증가는 적었지만 곽안련 선교사의 표현을 빌리면 '산골짝 깊은 곳이라 할지라도 복음과 접촉해 보지 않은 마을은 거의 없었다'라고 표현했을 정도로교회들이 연대의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했다.
2, 민족의 역사 이래 가장 어려운 위기 상황에서 민족의 에너지를 한데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
3, 국가적 절망의 상황에서 희망을 던져주었다. "기독교가 민족의 희망이다"라는 말이 퍼지게 되었다.
(백만인 구령운동의 기사 자료는 대부분 박용규 교수의 "평양 대부흥 이야기" 에서 얻고 인용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 시대의 부흥을 사모하는 작은 종 강순영 목사(JAMA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