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초기 나는 내 블로그(http://blog.kcmusa.org/yeqoim)에 글을 올렸다. 그리고 같은 블로그에는 '재림의 징조',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관한 글이 있다. 나는 그것으로 어느 정도 코로나를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후 계속되는 팬데믹의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허우적거리고 비틀거리며 방향을 잃은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을 본다. 누군가는 기사를 올리고 누군가는 책을 쓰고 누군가는 1945년에 나왔던 책을 개정판으로 내놓았다. 나름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한 사람은 화장실 설계도만, 한 사람은 주방 설계도만, 한 사람은 아이들 방 설계도만을 보고 그것이 마치 모든 것인 양 각각 건축을 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것이 서양신학의 한계다. 서양 사상 자체가 '구분, 구별'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것은 과학적 방법이다. 그러나 '통합' 없는 '구분, 구별'은 하나님의 섭리를 낱낱이 찢어 놓을 뿐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언제나 유기적이다. 구별은 해야 하지만 그 구별의 목적은 통합이 되어야 한다. 다음에 '동, 서양 사상의 비교'에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 하겠다.
첫 문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글을 써야겠다는 강박을 느낀다.
우선 이런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찾기 시작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인지 아닌지를 살핀다. 타락한 인간의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요셉이 노예와 감옥 생활을 할 때, 모세가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칠 때, 다윗이 소위 '광야 학교'에서 10년 동안 온갖 죽을 고비를 넘길 때 그것은 심판이나 징계가 아니고 훈련이었다.
우선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말할 때, 몇 가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죄가 있는가? 두 번째 과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심판을 시행할 시기가 되었는가? 셋째 말세의 마지막 심판은 어떤 조건에서 오는가? 등이다.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 가나안 진멸 등에서 우리는 하나님 심판의 조건을 본다. 그것은 죄악의 '관영'이었다. 어떤 경우라도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타락했다는 것이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결정하셨다가도 우선 기회를 주신다.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신 경우다.
하나님께서는 율법 초기에 안식일을 범한 자를 돌로 치라고 명하셨다. 그런데 그 이후에는 온갖 편법으로 안식일을 범하는 백성들에 대한 심판을 보류하신다. 복음의 초기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을 속였다는 이유로 즉각적인 심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 이후 다른 사람들이 간악한 방법으로 성령님을 속이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보류하셨다. 심지어 같은 시기 베드로가 외식을 했음에도 살아남았다.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율법 초기, 복음 초기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 정도의 순수함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다시 말해서 일벌백계의 심판이었다. 그 이후는 마치 노아 홍수 이후 무지개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시대를 살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율법 초기 또는 복음 초기처럼 심판하셨다면 모든 인류는 사라졌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제 국지적인 심판은 없다. 그러기에는 말세가 너무 가까웠다. 이제는 궁극적이고 영원한 심판만 남아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이다. 사도신경으로 우리가 고백하듯이 그 분은 '저리로서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라면 이것만 남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죄악이 관영해야 한다. 이제는 지금껏 상상도 못하고 볼 수도 없었던 죄악이 폭증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심판의 조건들을 완성할 것이다. 심판인지 아닌지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회개하자'고 한다. 세상은, 역사는 영원하지 않다. 그것은 주님의 심판으로 끝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개'조차 없어야 한다.
예레미야 5장 1절을 보라.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의인 한 사람이 없어서 하나님 심판의 조건이 완성된다. 어설프게 울며 매달린다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회개의 기회는 지나갔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고 하셨다. 동네마다 교회가 있고 심지어 LA에는 한 건물에 7개의 교회가 있다. 수를 셀 수 없는 목회자와 기독교 미디어들, 서점들이 있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 진정한 복음을 발견할 수 있는가? 오늘날 교회라 불리는 곳에는 '동방 풍속'이 가득하다. 이스라엘은 '동방 풍속'이 가득해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 이것이 마지막 심판의 조건이다.
말세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6-8).
이것은 죄악에 대한 특별한 심판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역사 종말의 모습이다. 이때도 사람들은 '시대의 징조'를 읽지 못하고 노아의 시대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는 '중'일 것이다. 이것은 회개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기도한다고 막을 수 있는 일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역사의 흐름이다. 아무도 이것을 거스를 수 없다. 이 섭리 속에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팬데믹이 있을 수 있다.
이럴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 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은 도대체 하나님을 알기나 아는 것일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분노하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다. 모든 것의 기준이 인간인 것이다. 내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시는 것일까? 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섭리로 영광을 받으신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우선순위는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야 한다.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내가 고난을 받을 수도 있다. 말세에 대한 성경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이 옥에 갇히고 죽는다. 이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 이것이 순교의 모습이다. 초대교인들은 그 모진 박해를 견디며 카타콤에서 살았다. 그런데 오늘날 소위 교인이라는 사람들은 도저히 이런 고통을 감수하지 않는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한다. 왜냐하면 '우상숭배'로 변질된 '거짓 기독교'를 믿어왔기 때문이다(이들이 '밤새 교인'이다).
'질병, 때 이른 죽음'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의 책이 최근 개정판으로 재 발행된 모양이다. 1945년에 나온 책이고 저자는 죽었다. 나는 그 저자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하나님을 아느냐고?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데 하나님 자녀의 죽음에 하나님의 뜻이 없다고 하는 것이 과연 목사의 성경 이해인지 참으로 참담하다. 그것을 최근 재 발행한 사람은 그 책 내용을 긍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혀 의미 없는 책을 70여년이 지나서 재 발행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이러한 성경 이해로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이다.
시편 139편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삶은 '형질이 이루기도 전'에 그 분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 인간 삶만이 아니고 역사도 그렇다. 다음에 '시간과 영원'이라는 주제에서 다루겠지만 하나님의 영원은 시제로 보면 언제나 현재다. 인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변화 속에서 살아가지만 하나님께는 그런 흐름이 없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묘막측한 섭리 속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맞추어주시는 것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한번 결정된 일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되는 일이 없다(다시 말하지만 인간의 인식 속에서는 그렇게 이해된다). 한번 결정되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것이 예정론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뜻은, 마치 인간과 호흡하며 인간의 결정에 따라 변화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마지막에 가면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던 대로 결론을 맺는다. 그래서 "내 인생 여정 끝내어 강 건너 언덕 이를 때 하늘 문 향해 말하리 예수 인도 하셨네" 하는 찬양이 사실은 야곱의 찬양이었다. 야곱은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했다. 야곱의 인생을 보면 하나님의 길을 떠나 저 멀리 탈선하는 것이 정상적인 결말이다. 인간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에서가 피해자고 그가 인격자였다. 야곱은 오히려 거짓말쟁이요, 사기꾼이며 대단히 이기적이었다. 그가 버림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147년의 인생을 마치는 날 자신을 막벨라 굴에 장사해달라고 유언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생사화복을 주장하신다고 말들 한다. 과연 그것을 믿는가? 그런데 왜 코로나 따위가 두려워 이리도 우왕좌왕 하는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한다면, 인간은 암이나 굶어서나 총에 맞아 죽지 않는다. 물론 그 방법으로 죽는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인 원인은 아니다. 암이 온 몸에 퍼져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죽지 않는다. 100일을 굶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죽지 않는다. 총알을 수백 발을 맞아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죽지 않는다.
모든 일의 궁극적인 원인은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떡 먹다가 그것이 목에 걸려 죽는다. 술을 마시다가 취해서 정신을 잃었는데 하필 엎드러진 곳이 접시 물이어서 죽는다. 사람은 코로나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죽는다. 그리고 죽고 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서 복이다. 성경에 대한 이해가 없는 자들은 인간이 불행하면 저주요 심판이고 인간이 평안하면 복이요 은혜라고 생각한다. 이런 천박한 기복 신앙적 성경이해가 오늘날의 혼란을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위 '행복 바이러스'와 같은 주장들이 바로 심판을 초래할 '동방 풍속'이다. 노아의 홍수 때 심판을 불러온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었음을 기억하라.
노파심에서 사족을 단다. 그렇다고 코로나 파티에 참석하지 말라. 마스크를 쓰고 손 소독제를 반드시 쓰고 방역에 힘쓰라. 총알이 빗발치는 곳을 일부러 활보하지 말라. 몸에 안 좋은 음식을 일부러 마구 먹지 말라.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147미터 높이에 있는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지 않으셨다. 조심조심 계단으로 내려 오셨다.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만용을 부리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