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 사회엔 기독교의 창조주 경배 신앙을 인간과 하나님을 분열시키는 서구적 신관이라며, 이를 도태시키고 동양적 신학으로 대치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본인이 한국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목적이 기독교를 중용의 신학으로 진화시켜 전혀 다른 신학적 베이스에서 목회하는 신학생들의 양성을 위한 것이라고 당당히 주장하는 어떤 분의 영향 때문인지, 최근 한 기독교 인터넷 신문에서 기독교인의 분별을 죄악시하는 논조의, 몹시도 이상한 칼럼 하나를 보게 되었다.
기독교는 분별의 종교
기독교와 불교를 비롯한 동양 사상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전자가 '분별'의 종교라면, 후자는 '비분별'의 종교라는 점이다.
범신론에선 내가 우주와 하나가 되어 일치를 이룸으로 신성을 깨닫는 것이므로 어떤 것이든 독립적이고 구별되는 대상-너와 나, 저것과 이것-을 허상이라고 주장한다.
인식적·존재적 차원에서, 범신론적 관점이 창조자와 피조물의 구분이 없고 주체와 객체와의 관계도 모호한 반면, 기독교에선 나와 절대자, 나와 대상과의 구분이 뚜렷하다.
그러므로 범신론적 관점에서 성경을 읽고 해석하면, 통전적 이해가 불가능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예수의 그리스도성을 믿을 수 없고, 신자의 분별의 기준이 되는 말씀의 권위를 부인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최근 동성애 이슈에 대한 사례에서 혹자는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이므로 인간적 분별을 없애거나 초월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분별을 차별과 동의어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자의 분별은 성경 말씀에 기준한 것으로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실 때, 사람들에게 말씀에 기준한 구별이나 분별심을 갖지 말라거나 이를 초월하라는 뜻을 피력하신 적이 없다.
예수님 말씀 중 분별에 대한 오해
그러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 중에 분별을 금하신 내용으로 오해한 경우를 살펴보자. 예수께서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종이 되라"고 하신 말씀이나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말씀하신 의미는, 큰 자와 작은 자를 분별치 말고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를 분별치 말라는 뜻이 담긴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 말씀의 의미는 가장 크고 높으신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께서 이 땅의 사람들 중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사람을 끝까지 섬기시되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신 믿음의 태도를 우리가 본받아 가지라는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가르침에는 '큰 자'와 '섬기는 자',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의 구분과 분별이 엄연히 전제되고, 그러기에 그 의미가 우리에게 깊은 도전과 울림을 주는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하신 것은 인간적인 기준에서 인정하는 가늠이나 예측을 넘어, 휴먼 에이전트를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누구나 입을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다.
또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이웃과 원수를 구별할 것 없이 그저 사랑하라는 뜻이셨을까? 그렇지 않다. 어떻게 정상적인 사람이 현실적인 감각없이 원수를 이웃과 똑같이 생각할 수 있겠는가?
주님은 이런 경우 현실적인 팩트를 무시하고 의식의 활동을 인위적으로 차단함으로써 자의식이나 감정을 무 (無)의 상태로 만들라는 불교식의 주문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선 우선 우리가 세상을 살아 갈때에 대인관계에 앞서, 먼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바로 자각하기 원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먼저 우리 각자의 존재적 상태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원수된 자, 즉 죄인임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요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케 하시기 위해, 예수 자신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피흘리고 죽으시기 위함임을 누누히 설명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벧전 4:1)".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그치신 것처럼, 우리도 원수된 이웃의 연약함 즉 이웃의 죄를 내 허물과 내 아픔처럼 끌어 안는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방법으로, 주님은 먼저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는 지침을 우리에게 주셨다. 모세의 기도가 떠오르지 않는가?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께 버림받는 걸 무릅쓰고라도,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처절히 간구하던 모세의 중보기도가....
모세의 중보기도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마음과 상통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선 우리가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마음을 점점 닮아가도록 이끄시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우리의 원수 사랑엔 마땅히 영적 분별이 따르고, 죄에 대한 분노와 사람에 대한 연민이 따르며, 허물을 껴앉는 십자가의 고통이 따르고, 회복의 의지가 따르고, 영생의 소망이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지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려 한 하나님 나라의 지혜는 혹자가 주장하는 대로 세상을 관통해 바라보는 지혜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려 주기 원하셨는데, 그 비밀의 요체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즉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알리시고자 하신 것이다. 곧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는 걸 우리가 알기 원하셨다(고전 1:24).
바로 이 비밀의 지혜를 깨달은 사람이 하나님의 눈동자에서 은혜를 발견한 사람, 즉 하나님께서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사랑하시는 자요,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한 사람이요, 하나님의 마음으로 지혜롭게 살아가는 자가 된다.
한편 주님의 사역 중 주님께서 보이신 반응 중에 사람들이나 현실에 대한 '경멸'이란 표현은 참으로 부적절한 묘사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가슴은 늘 유리하는 인생들에 대한 연민으로 애절하기 그지 없으셨고 불의에 대해 뜨겁게 아프셨기 때문에....
성경을 총체적으로 읽으며 말씀의 의미를 콘텍스트적으로 깨달으면, 결코 성경 어느 한 군데도 언어적·논리적 모순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살았던 삶은 혹자의 오해처럼 주님과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온전히 성취하신 그리스도적 삶의 자취를 따르는 삶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크리스천들의 삶은 고난을 감수하며 십자가를 지는 삶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당연 살아감과 죽음이라는 양면의 차원에서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또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존귀만을 드러내고자"라고 힌 것이다 (빌 1:20).
차별금지법과 동성애 이슈
혹자는 예수 시대에 세리와 매춘부 등 소외계층을 차별하던 종교 위선자들의 모습이 오늘날 하나님의 뜻을 거론하며 차별금지법과 동성애를 분별하고 시시비비를 나누는 우리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고 성토한다.
차별금지법과 동성애를 분별하는 것이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어긋나며, 시대적 기준과 형태로 대상을 분별 정죄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또 동성애를 '성기능 장애'와 연결짓기도 하는데, '성기능 장애"에 관한 언급은 레위기에 열거된 육체적 장애들중 하나로서(레 21:20), 동성애의 성격과는 상이하다.
예수께서는 독신의 자격을 말씀하실때 세 종류의 '고자'에 관한 언급을 하셨는데(마 19:12), 두 경우 역시 육체적 장애를 설명하신 것이며, 말씀의 포인트인 "스스로 된 고자"란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해 독신을 결심한 경우를 빗대신 말씀으로 동성애 이슈와는 역시 무관하다.
'성기능 장애'나 '고자'와는 구별된 '동성애' 이슈를 성경은 도덕적·심리적·의지적인 죄로 설명한다(창 19:5; 레 18:22; 20:13; 삿 19:22; 롬 1:26-27).
어떤 경우, 동성애 이슈가 심신복합적 이슈를 안고 있는 예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인 만큼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아닌 개별적 차별금지법의 범주 안에 두어야 마땅한 것이다.
주님의 모본
혹자는 동성애 이슈와 연관지어 예수가 간음해 끌려온 여인에 대해 보이신 경우를 예로 들면서 분별 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여인의 육체를 구하신 것은 그녀의 영혼이 구원받을 기회를 주시고자 함이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 여인을 위한 주님의 당부를 볼 때, 주님께선 죄에 대한 분별적 인식을 하셨음이 분명하다.
주님이 여인을 정죄치 않으신 것은, 당시 정황을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상대 남자를 제외한 여인만을 끌고 온 자체부터 율법에 어긋날 뿐 아니라, 예수를 시험하려는 저들의 악한 동기를 익히 간파하신 주님께선 무엇보다 영혼에 대한 연민으로 충만하셨다.
이에 증인된 저들의 죄성을 먼저 일깨우셔서, 궁극적으로 회개를 통한 구원-생명의 성령의 법으로써 죄와 사망의 법에서 저들과 여인 모두를 구원하시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오늘날 동성애 이슈를 대함에도 우리는 주님이 보이신 모본을 따라가야 옳겠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동성애자들에게 무턱대고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닌, 그들의 한 영혼 영혼에 대한 연민을 품어야 한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다양한 동성애 이슈를 대함에 있어 마땅히 이성적, 영적 분별이 따르고, 죄에 대한 의로운 분노와 사람에 대한 연민이 따르고, 연약한 자의 짐을 지는 고통과 인내가 따르고, 힐링을 도우려는 의지가 따르고, 회복과 영생의 소망이 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수 년 전 미국 고등학교에 다니던 딸 아이가 자기 학교에서 스스로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한 친구 '애니'에 대한 일화를 말해주었다.
딸아이의 한인 친구이자 기독교인인 '멜라니'가 어느 날 점심시간에 모든 학생들이 수군거리고 왕따시키는 '애니'에게 동성애를 비난하며 직선적으로 힐난 투의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딸아이는 애니의 처지가 퍽 안돼 보였는지, 어떤 기회에 '애니'에게 다가가 두 손을 잡고 마음을 위로하며 기도를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애니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고맙다며 몹시 흐느끼더라는 것이었다.
당시 딸아이의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평상시 멜라니에 비해 전도력이 미약해 보이는 딸아이를 언짢게 여기고 있었던 필자로선, 별안간 상식의 허가 찔린 듯 움찔한 동시에, 가슴 한편이 촉촉히 적셔지는 듯, 뿌듯하고 형용할 길 없는 감동의 파문이 잔잔히 밀려왔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예수께서 경계하신 것은 분별심 아닌 정죄심
대개의 경우 성경을 거론하면서 분별을 유독 터부시하는 것은 전술한 바, 동양사상적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동양사상에선 세상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이 허상인 우주의 한 부분일 뿐이고, 진정한 궁극적 진리의 실재는 구별이나 분별을 초월한 우주와의 연합이라고 주장한다.
이 연합의 상태는 선과 악, 죄와 거룩, 노와 소, 생명과 죽음, 지혜와 우매, 진실과 거짓의 구분이나 분별이 없는 비인격성적(impersonal) 상태로의 진입으로 묘사된다.
이런 관점은 하나님과 사람에 관해 인격성(personality)을 가장 중요시하는 기독교와 정반대의 것인데, 인격성은 자기 의식과 자기 결정권을 필요로 하며, 생각하는 주체와 생각되어지는 사물이 구분되는 복합성을 지닌 탓이다.
그러므로 불교적 관점에서 동성애를 비롯한 성경의 죄 문제를 해석하면 범죄자와 판단자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자기 행위에 대한 결정권자인 자신의 책임의 소재가 모호해진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바 '말씀이 곧 예수'임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말씀의 권위를 부인하는 것으로 이어지며, 말씀을 기준으로 행하며 사는 삶의 중요성을 간과하게 한다. 따라서 '문자', 즉 '말씀'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하나님의 마음'등 같이 아전인수격인 자기 식의 엉뚱한 해석을 낳게도 된다.
요컨대 예수께서 경계하신 것은 말씀을 기준한 '분별심'이 아니라 십자가 없는 '정죄심'인 것이다.
예수 말씀의 중요성 강조
예수께선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의 척도를 우리의 '말씀 지킴'에 두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 14:23-24)".
예수께선 율법 무용론을 주장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승계, 보완, 확장하시고 완성하시러 오셨음을 분명히 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기준 없고 분별 없이 그저 무턱대고 사랑만을 베풀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하지 아니하게 함으로 그가 범죄하지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겔 3:21)".
성경에서 제사 즉 예배에 관한 비교급의 언급은 이를 등한시하라는 뜻이 아니라, 예배의 근본 정신인 자비와 순종과 회개의 삶을 강조, 촉구하는 의미로 쓰였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 12:7)".
예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분별을 무색해 하는 '무분별'이 아니라, 말씀에 기준해서 냉철하게 '분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말씀에 어긋난 이웃의 문제에 대해 말씀으로 깨우치고 심령이 새롭게 변화를 받도록 도움으로써,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새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주님의 뜻을 아는 우리 크리스천으로서, 동성애가 들어간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마치 동성애의 도덕적 정당성을 공인하는 듯한 잘못된 시그널을 주는 제도적 인준이 국민들에게 미칠 커다란 악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우리의 연약한 형제 자매를 세상 법의 함정 혹은 유인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전력을 다해 이 법이 제정되지 못하도록 기도하며 절실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내에서 누군가 이런 외침에 대해 피상적으로 판단해, 마치 비성경적 편견이 낳은 다툼·미움·갈등을 일으키는 것인 양 인식하고 대립한다면, 이들의 상태야말로 진정한 복음의 근본 핵심 가치와 미션에 대한 인식의 결여나 오인으로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을듯 하다.
박현숙 목사
인터넷 선교 사역자
리빙지저스, 박현숙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9awEs_qm4YouqDs9a_zCUg
서울대 수료 후 뉴욕 나약신학교와 미주 장신대원을 졸업했다. 미주에서 크리스천 한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해 왔다.
시집으로 <너의 밤은 나에게 낯설지 않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