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이 정말 죄책 지워낼 수 있는 것인가
범죄와 죽음, 삶의 근원적 차원 요동시켜
자살 선택 유력자 범죄, 기독교적 성찰은
◈자살과 스캔들: 왜 대중은 박원순 시장의 스캔들에 집중하는가?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이들이나 엘리트들이 성적인 스캔들로 명성과 지위를 잃는 일은 언제나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여기서 묻고 싶은 점이 있다. 평범한 소시민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대중이 그렇게 사회의 지도부까지 올라갔다가 몰락한 이들의 모습을 보고 느끼는 바는 무엇인가?
대체 어떤 점이 그들에게 그토록 강렬한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일까? 소위 '잘 나가던' 인사들, 일반 소시민들의 입장에서는 부러워 마지 못할 위치에 있던 이들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심이 해소라도 되는 것일까?
그런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러움와 질투의 해소로 인해 얻는 쾌감은 일시적일 뿐, 여전히 미디어에 즐비하게 등장하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 엘리트들의 모습은 잠시 해소되었던 부러움의 감정을 다시 되살려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대중이 사회 지도층 인사의 성추문이나 성범죄로 인한 몰락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그런 사안들이 갖는 극단적 모순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스스로 안전함을 느끼는 수준까지는 순리와 평온함에 몸을 내맡기려 하지만, 정작 그 순간이 다가오면 긴박감 없는 삶을 지루해 하면서 재차 삶의 모순, 반전, 역설에 눈을 돌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관심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최고의 관전 대상은 범죄와 죽음의 현장이다. 범죄와 죽음은 삶의 근원적 차원을 요동시킨다. 어쩌면 이것은 인류 전체를 휘감아 지배하는 원죄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굳이 범죄와 죽음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안온한 삶을 향유하는 이들조차, 이런 부정적 계기들과 관련된 볼거리, 가십에 호기심을 가지는 이유는 그것이 그들 심성의 가장 밑바닥에 깔린 죄성을 상기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잘 짜여진 범죄물, 특히 살인을 다루는 각종 미디어 콘텐츠가 끊임없이 생산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항상 충분한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통념상 사회 지도층 인사쯤 되면 내면에 위선적 측면들이 있다 하더라도 철저한 자기관리를 통해 이를 절제할 수 있는 이들이라 여겨진다. 그런 이들이 악질적 범죄자 혹은 시정잡배들이나 저지를 만한 일을 벌이고 그로 인해 곤혹스러워하는 모습, 도저히 그런 일을 벌이지 않을 것 같은 인물들에게서 어이없는 범죄가 발생하는 대목에서 사람들은 모순과 반전이 선사하는 카타르시스 같은 것을 느끼는 듯하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실종과 자살은 최근까지 스캔들로 몰락했던 몇몇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사례 가운데 이런 요건에 가장 부합하는 사건이었다.
평소 친근한 소시민적 이미지를 강조했으며, 오랜 세월 인권변호사로서 활약하여 정의감 있는 인물이라는 평을 받아온 그가, 그것도 국내 최초로 성추행 사건을 공론화하며 여성인권 신장에 앞장섰던 그가, 직접 부하 여직원을 위력으로 성추행한 혐의로 고소된 일은 모순 중의 모순이요, 반전 중의 반전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그 불명예스러운 혐의를 받고서 그가 취한 행동 역시 모순적이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시정을 맡은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행방불명이 되어 전 국민을 한순간에 실종 추리극 안으로 끌어들인 일 역시 반전을 즐기는 대중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즉 의식적이든 아니든 간에, 대중의 다수를 차지하는 소시민들 대부분은 진심 어린 걱정보다는 인간 본연의 근본적 호기심에 끌려 이 사태를 바라봤던 것이다.
◈자살과 죄책: 공소권 없음이 심판의 면제인가?
잠시 시간이 지나, 10일 자정 즈음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실이 확인됐다. 그 후 대중의 반응은 각각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양극단으로 갈려져 있다.
한편은 그의 죽음이 자업자득이라며 그 스스로를 자살로 몰아간 범죄 혐의를 지탄하고 있고, 다른 한편은 그의 죽음에 무조건적인 애석함을 표하며 그의 자살 원인이 된 성추행 혐의를 희석시키고 덮어버리려는 데 열중하고 있다.
양측 가운데 어느 편의 태도가 더 정당한가?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한번쯤 고민해 볼 만한 일이다. 일단 기본적으로 한국인들에게 죽음은 다분히 유물론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혼비백산(魂飛魄散). 혼은 널리 날아가고, 육신은 땅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이것이 유교적 통념에서 한국인이 생각하는 사후(死後)의 운명이다. 물론 성호 이익이 설파했던 것처럼 혼이 완전히 흩어지는 데 일정한 시간이 걸리고 그 사이에는 귀신이 되어 떠돈다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한국적 관념의 사후세계 속에서 인간의 죽음은 곧 완전한 존재적 소멸로 이어진다. 그러다 보니 죽음은 그 사람의 살아생전 모든 과오를 덮는 가장 완벽한 계기로 작동하기 일쑤다.
천인공노할 대죄를 저지르지 않은 이상 이런저런 허물은 죽음이 선사하는 비감에 쉽사리 묻히게 된다. 특히 그것이 오랜 시간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이었던 한국 사회에서는 별 허물 취급도 받지 못했던 여성에 대한 성희롱, 성추행, 성추문인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이런 정신문화적 폐습이 존재하는 까닭에, 한국에서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 고위공직자들이 도덕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했을 때 자주 극단적인 선택을 하곤 한다.
외국이라고 엘리트들이 몰락할 때 자살하는 일이 없겠느냐마는, 한국의 경우 위에 설명한 심리 상태가 위기에 몰린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주된 원인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이것이 대단히 잘못된 일로 여겨진다. 여기서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는 일이 성서적으로 판단했을 때 죄악인가 질병인가 하는 논의를 재개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 해묵은 논쟁을 이 짧은 논평으로 해결하려는 것 자체가 만용에 가까운 일이다.
그보다 현재의 국면에서는 자신의 범죄로 인해 구석에 몰려 자살을 택한 유력자들의 범죄 문제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에 집중하는 것이 보다 현명한 일일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각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 문제를 너무나도 절박하게 마주하도록 한다. 인간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비극과 운명인 죄책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되는 측면이 있다. 죄책을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이 죄를 몸소 저지르는 것까지 다스릴 수 없다는 말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죄성을 행위로 옮기는 것까지 전혀 다스릴 수 없다는, 개별적인 범죄 사실조차 전적인 예정 안에 있다는 견해는 극단적 칼빈주의(Hyper-Calvinism)의 주장이며, 이런 견해는 역사적으로 볼 때 항상 복음의 권능을 약화시키고 교회를 피폐하게 만드는 역할을 해 왔다. 17-18세기경 영국의 장로교회와 특수침례교회 등이 그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
인간이 죄책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죄의 당연한 결과로서 사망과 심판을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스스로 지은 죄로 인해 궁지에 몰려 자살을 택하는 이들의 선택이 허망한 시도임을 폭로한다. 죄책의 문제는 자신이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는다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죄는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심판을 받는다. 이것이 영혼의 실재를 믿는 기독교 신앙의 죄책 이해이다.
서구에서든 한국에서든 피의자의 사망이나 자살은 곧 공소권 없음, 수사의 종결로 이어진다. 그러나 양측의 법철학적 사상배경은 다르다. 현실적으로 수사를 더 이어갈 수 없다는 데서 불기소 처분을 내리는 점에서는 매한가지지만, 기독교 문화를 배경삼는 서구에서는 피의자 자살로 인해 해결되지 못한 죄과의 심판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사상적 배경이 깔려있는 반면, 유교 문화를 배경삼는 한국에서는 죽음을 통해 자잘한 죄과 정도는 소멸되었다는 믿음을 반영한다.
전자의 경우는 공의를 중시하고, 어떻게든 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신앙의 의지를 중시한다. 반면 후자의 경우 공감과 동정을 중시하고, 죄 문제를 유야무야하는 어중간한 태도를 부추긴다. 양측의 차이는 정의와 공의에 대한, 죄의 무게감에 대한 각각의 인식을 반영한다.
어느 편이 더 맞고 틀리는지 따지기 전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기독교적 배경에서 자살을 선택한 이의 죄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남겨진 이들의 도덕적-신앙윤리적 경각심을 보다 온전하게 일깨운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곧 온전한 역사인식에 대한 발판이 되기도 한다. 동정과 감상으로 한 사람의 명백한 과오를 덮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 인물에 대한 왜곡된 역사적 평가가 되고, 더 나아가 왜곡된 현실인식이 된다.
박원순 시장의 죽음에 무조건적인 동정을 보내기 전에 우리 자신의 삶을 위해서라도 이 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