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하지 않은 얼굴

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Photo : ) 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유시민이 그랬습니다. '정치를 그만둔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10년 동안 정치를 하면서 찍힌 자신의 얼굴이 편치 않고 괴로운 모습이었다'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직장 동료들 간에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것이 필요하답니다. 일주일간 찍고 그 얼굴이 편치 않으면 그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좋다고 하네요.

우리 각자의 얼굴은 어떤가요? 편한가요? 하고 싶은 일 하며 살아가는가요, 아니면 마지못해서 하고 있는가요? 얼굴이 편하다는 것은, 하고 싶은 일 하며 산다는 것일 겁니다. '그럼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질문해 봅니다. 하고 싶은 일이야 많겠지만, 언젠가 정말로 해 보고 싶은 일 중 하나는 우편배달입니다. 시간에 쫓겨 일을 성사시켜야만 하는 택배 기사 말고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에 나오는 우편 배달부처럼 자전거 타고 다니면서 사람들의 마음과 그 마음의 의미를 전달하는 그런 우편 배달부가 되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하기야 어릴 때 신문 배달 경험이 있기에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지는 않은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우편배달을 쉽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기에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어느 직업이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피해 안 끼치고 하고 싶은 것하고 살면 되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무슨 거창한 도덕적 판단 기준으로서의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법"으로서의 삶의 잣대 같은 것은 적용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싶은 것 너머 그것을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일은 무엇일까요? 나에겐 강의하고, 설교하는 것을 포함한 '글 쓰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사실 제일 좋은 일을 하는 셈이지요.

2. "나를 향한 요구"

"고인 물은 나의 과거다. 내게 절대권력을 행사했던 아버지 밑에서 나는 소심하게 자랐다. 그리고 고집 센 소띠 남편과 살고 있다. 나의 사회적 욕구는 반영되지 않은 채 50여 해를 살아왔다. 그러나 내 안에도 나를 향한 요구가 있었다. 생의 한 순간쯤은 이기적으로 살아도 좋지 않을까? 더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어느 날 외출을 감행했다. 미국 유학이었다." 이성숙 작가의 『고인 물도 일렁인다』 머리말에 나오는 작가의 솔직한 속마음입니다. 그 속마음을 들여다보니 내 마음도 일렁이다 못해 출렁입니다. 애써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고,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으며, 부인하려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자신의 내면 안에 일렁이는 "나를 향한 요구" 혹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그건 바로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해 보는"1) 것일 겁니다.

이 욕망을 부정할 수 있을까요? 이 욕망을 욕심이라 단정 지을 수 있을까요? 아니 오히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단 한 번 사는 인생, 자신의 가슴이 말하며, 그 말하는 것을 생각만 해도 심장이 뛰는, 그러한 '자신을 향한 요구'에 응답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당위로서가 아니라 생의 간절함으로 말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한 번쯤은 '이기적'으로 살만합니다. 그것이 글 쓰는 일이라면 더욱이 '괜찮다'라는 면죄부조차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강가에 홀로 있는 이, 그는 무엇 하러 거기 서 있는 걸까요. 그도 무언가 삶이 허전해서 그곳에서 강의 고독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아는지 물안개가 그를 감쌉니다. 세상의 많이 것이 허전합니다. 채워지지 않기에 각종 SNS에 사진이든 글이든 영상이든 자신을 나타내고, 자신의 능력을 채우고, 타자의 관심으로 채우고, 시간을 채우고, 때론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없어서 먹방으로, 술로 채우려 합니다. 우린 다들 그렇게 허전한 것들을 채우며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채우는 것도 물안개 같습니다. 금세 사라지니 말이지요. 현재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마음이 허한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바람의 딸" 한비야가 케냐에 갔을 때 일이라고 합니다. 케냐 대통령도 그를 만나려면 며칠을 기다려야 한다는 유명한 안과의사가 강촌에서 전염성 풍토병 환자들을 돌보는 모습을 보면서 한비야가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아주 유명한 의사이면서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런 험한 곳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러자 그는 웃으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과 재능을 돈 버는 데만 쓰는 건 너무 아깝잖아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일이 내 가슴을 몹시 뛰게 하기 때문이에요."2) 그렇죠. 가슴 뛰는 일을 해야죠.

좌우명(座右銘)의 사전적 의미는, "늘 자리 옆에 갖추어 두고 생활의 지침으로 삼는 말이나 문구"입니다. 이런 거창한 상징적 표어 없이 살아가는 이들도 많이 있겠지만 삶의 신념을 들여 볼 수 있는 좌우명 하나 정도는 가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나의 좌우명을 굳이 만들어 보자면, '해야 하는 일이, 하고 싶은 일이며, 가슴 뛰는 일이 되게 하라.'라고 지어봅니다.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당위로 살아가는 사람'과 '하고 싶은 것을 하며 가슴 뛰게 살아가는 사람' 사이를 불편한 경계선으로 그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해야만 하는 일이, 하고 싶은 일이면 되지요. 그것도 가슴 뛰는 일이면 더더욱 바랄 것이 없고요. 하고 싶은 일은 사회적 당위성을 지니면 더욱 좋습니다. 오늘도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단순한 도덕적/규범적 당위로서가 아니라, 가슴이 원하며 심장이 지시하는 일을 한다면, 그러한 인생, 살만하지 않은가요.

3. 글 쓰며 사는 인생

어느 날 문득 숟가락 드는 것에도 별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필시 삶에 의욕이 없다는 표징이기도 할 것입니다. 삶이 신산스럽다는 증거겠지요. 그럴 땐, 초점 흐린 눈동자로 하늘을 보며 "지금 뭘 하고 있지?" 하고 스스로 물어봅니다. 왜 이런 몸의 반응이 왔을까요? 그것은 지금 하는 일이 가슴이 뛰지 않는 일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분명 지금 하는 일이 자신이 "진심과 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이 아닐 수 있음을 보여주는 마음의 소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YOLO(욜로족)", "You only live once." 욜로족은 단 한 번 사는 인생이기에 정말로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살기를 원하는 이들의 상징적 표현인 것 같습니다. 내가 제일 부러워하는 사람 중 시인은 늘 영순위입니다. 그들이 단어를 선택하고, 언어를 다루는 능력과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는 능력이 부러운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더 부러운 것은, 그들의 언어에는 어떤 기피의 대상도, 어떠한 주저함도 없다는 것이지요. 저잣거리의 저속한 언어를 이야기해도 욕하는 자 없습니다. 그러나 목사는 이런 이야기 하면 세상이 불편해합니다.

"자기 자신"을 타이핑 하는데 자꾸 거시기하게 거시기를 상징하는 오타가 납니다(이걸 말로 표현해 버리면 외설이 되고, 저속한 언어가 되기에 원초적 상상과 그대의 애틋한 감수성에 맡기겠습니다). 하나님을 고백하고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는 목사는 시인들처럼 무슨 주제든 말할 수 있고 또 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랬던가요. 화이트헤드라는 철학자는 하나님을 "세계의 시인"으로 묘사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유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때, "세계가 나의 교구다"라고 말했던 웨슬리처럼, '세계가 나의 글쓰기 꺼리다'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오지랖인가요?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이렇게 적은 적이 있네요. "그런데 때로는 화두를 잃고 살아갑니다. 생각 없이 산다는 이야기일 겁니다. 글은 세상에 흘러가는 생각, 무질서한 관념을 지면 위에 옮기는 것인데 글도 어떤 계기나 동기가 필요하죠. 동기 없이 무엇인가를 쓰고자 하면 글이 되지 않은 경우가 많을 겁니다. 쓰기는 쓰되 쓰는 이의 열정이 드러나지 않고 인내력 또한 약화 되지요. 내적이든 외적이든 동기가 있어야 꿈틀거리는 글이 나오는 법인데 말입니다. 주어진 일을 기계적으로 하다 보면 사고의 생산이 없습니다. 살아가는 목적 중 하나가 적어도 저에게는 생각하며 글 쓰는 것인데 그걸 못하면 분명 심장이 원하는 삶은 살지 못하고 있음에 틀림없을 겁니다. 더 이상 후회하지 않기 위해 어느 날 문득 '외출'이라도 해 볼까요."

4. 생명 깃든 언어로

운전하다 보면 상대방이 실수할 때도 있지만 자신이 실수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F로 시작하는 욕을 해댑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욕이 마음에 와닿지를 않습니다. 다만 그가 마치 성화 봉송 주자처럼 결기에 찬 표정으로 오른손 중간 손가락을 높이 치켜들어 보여줄 때 그때 서야 그가 열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지요. 그러나 그것 또한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지는 못합니다. 영어뿐만 아니라 각종 외국어로 듣는 욕은 마음에 둥지를 틀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모국어로 욕을 들었을 때보다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 욕은 토종 욕을 먹어야 가슴이 벌렁거리는데 말이지요.

나에게 있어서 관공서의 언어는 가장 어려운 언어 중 하나입니다. 이해를 못 할 뿐만 아니라 이해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기 때문이지요. 거기 가면 없는 두통도 생기고 가슴도 답답해집니다. 그러니 자연히 그런 곳을 가지 않게 되죠. 그곳에는 매우 건조한 언어가 오고 갑니다. 그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언어도 의미가 없지는 않지만 건조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관공서의 언어가 촉촉한 언어가 될 수 없을까요? 관공서의 언어에 생명이 깃들 수 없을까요? 감히 장담컨대, 관공서의 언어가 시적인 언어가 되고, 관공서의 언어에 생명의 꽃이 피면, 그 사회는 분명히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인기 드라마나 좋은 영화, 좋은 노래, 좋은 연설은, 보고 듣는 이의 마음에 닿기 때문에 그런 평을 받을 겁니다. 언어가 타인의 마음에 닿지 않으면, 그 언어는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구천을 헤매게 될 것입니다. 사어(死語)가 되는 것이지요.

대중 앞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울 때가 있습니다. 감정이 언어를 삼켜버려서 그럴 것입니다. 언어가 감정을 이겨야 논리가 발화되는데, 감정이 언어를 이겨 버리니까, 눈물이 나오죠. 하지만 감정의 언어는 논리적 언어보다 때로는 훨씬 효과가 크고 감동 있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 샤갈(Marc Chagall)의 말이라 합니다. "If I create from the heart, nearly everything works; if from the head, almost nothing."3) '가슴으로 창작하는 것'과 '머리로 창작하는 것'의 차이는 그것이 현실에 작동하느냐 그렇지 않으냐로 나타난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물론 좀 과장된 표현이지만, 가슴과 머리가 갈등할 때는 가슴이 시키는 것이 맞다고 흔히 말하지 않습니까? 가슴이 뛰게 하는 그 일이 맞죠.

5. 존재를 걸고 가슴 뛰게 일하며 산다는 것

BTS가 뭔지... 언젠가 LA에 BTS가 와서 이틀간 난리가 난 적이 있습니다. 한 해 전에 그들의 공연을 못 본 딸이 그해에는 친구 덕분에 보게 되었습니다. 딸은 그렇게 공연에 갔다가 새벽 1시에 녹초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9만 명이 관람했다고 하니 근처 교통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렇게 힘들어도 간 것은 가슴이 뛰기 때문이겠죠(그런데 말입니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내 이름을 우기면 짝퉁 BTS(박동식)가 되는데, 우리 딸은 너무 멀리 가서 BTS를 보고 온 것이지요. 그런데 최근 강적이 등장했습니다. 북창동 순두부(BTS)ㅎㅎ).

개인적으로 놀이기구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을 즐기지 못하고 견뎌야 하기 때문이죠. 나에겐 유치원생 아이들도 잘 타지 않는 회전목마가 딱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아내가 타는 동안 챙겨간 책을 봅니다. 제 딸이 BTS 보러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도 좋은 것은 가슴 뛰는 일이었기에 그렇고 제가 놀이기구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그 시간을 즐기지 못하고 견뎌야 하기 때문일 겁니다. 좀 덜 견디고 가슴 뛰는 일을 해야죠.

Multa lumina lux una-"many flames, one light"(여러 개의 불꽃과 하나의 등불). 한때 공부했던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의 모토입니다. 하나의 등불이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불꽃처럼 타올라 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는 일이 즐거워야 하고 가슴이 뛰어야 하고 그 일에 미쳐야 합니다.

언젠가 강의를 마치고 아내에게 "집으로 간다"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강의 미치도록 잘했나 봐?"라는 뜬금없는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뭔 말?" 했더니 내가 보낸 메시지를 다시 확인하랍니다. 다시 보니 "강의 '마쳐서' 간다"가 아닌 "강의 '미쳐서' 간다"가 되어있더군요. 미친 강의였나 봅니다. 가만히 보니 좋은 표현 같습니다. 강의는 미치게 해야죠. 그래야 학생들의 마음에 가닿지 않겠습니까. 요즘 온라인으로 강의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앉아 있지만, 강의실에서 강의할 때 앉아서 강의한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선 앉아서 강의하면 스스로 열정이 올라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돌아다니면서 손을 막 사용해야 강의가 됩니다. 이탈리아 출신도 아닌데 말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있다면 존재를 걸어야 합니다. 거기에 "미쳐야" 합니다. 파스칼이 그랬네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미쳐 있다. 그래서 미치지 않은 것도 다른 형태의 광기라는 점에서 미친 것과 같다."4) 파스칼의 말대로 어차피 미친 인생이라면, 가슴 뛰는 일에 미쳐야 할 것 같습니다. 동네 야구장에서 꼬맹이들이 야구 시합을 하는데 부모들이 더 난리입니다. "고고 go go" 하면서 말이죠. 뛰는 사람도 중요하고 흥을 돋우는 사람도 중요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흥을 돋우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기운을 빼고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라 흥을 불어 넣는 그런 삶 말이죠.

마이클 프로스트와 앨런 허쉬가 영화 <치킨 런(Chicken Run)>을 소개해 주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암탉들이 포로수용소 같은 양계장에 갇혀 달걀만 낳는 모습을 그려 주고 있는데, 생산이 시원찮은 닭들은 바로 저녁 식탁에 오르게 된다고 하네요. 주인공 진저(Ginger)는 자유를 찾아 탈출하려 합니다. '달걀을 낳다가 죽는 것, 그것이 닭의 운명'이라는 어느 동료 닭의 이야기를 견뎌가며, 희생과 탈출 후의 비전을 바라보며, 날아다니는 기계를 만들어 급기야 탈출합니다. 진저는 "자신의 목숨", 즉 존재를 걸었던 것이지요.5)

그런데 우리의 가슴을 누가 뛰게 하는가요? 우리 자신이 뛰게 할 수 있는가요? 도널드 세베스타노(51세)라는 분이 '100만 달러 복권 맞고 3주 만에 암으로 사망했다'는 뉴스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복권 당첨되고 '여행도 가고 싶고 건강검진도 받고 싶다'고 했다는데 검진 결과 폐암 4기였다고 합니다.6) 인생 참,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스스로 힘을 불어넣는다고 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돈이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생명의 영, 즉 성령이 들어와야 합니다. 마른 땅에는 하늘의 비가 내려야 하고 강줄기에는 물이 충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도 우리의 일에 존재를 걸 수 있으며 자기 삶에서 건진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6. 자기 이야기 하기

<골목 식당> 프로그램에서 포방터 돈가스집 사장님이 원주 돈가스 사장을 도와주면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내 몸이 피곤해야지. 내 몸이 고단해야지. 내가 편하면 손님 입이 불쾌해지죠." 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음식을 만들면서 가진 자기 이야기, 즉 자기 철학인 것 같습니다. 편하게 일해서 돈 벌자고 장사해서는 안 되겠죠. 비록 피곤하더라도 손님을 위해 더 좋은 맛을 제공해 주겠다는 생각이 자신의 가계를 살리는 것이지 싶습니다. 낙엽 청소하기 귀찮다고 불편하다고 나무를 자를 수는 없는 법이지요. 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약간의 불편함을 참고 넘어가야 합니다.

자신의 삶이니 존재를 걸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겠지요. 포스트모던 철학자인 리처드 로티는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창조>한다고 했습니다.7) 비슷하게, 2020년 2월 봉준호 감독이 오스카 영화제 감독상을 받으며 자신이 어릴 때 영화 공부하며 마음에 새긴 한 문장을 소개했습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그 말은 그 자리에 함께 감독상 후보로 올랐던 영화계의 거장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말이었습니다. 그것을 그는 자신의 영화를 만드는 모토로 삼았다는 것이지요.

개인으로 더 들어가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야 합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가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나이 제한도 없습니다.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라는 노랫말처럼 말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늙어서 사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가 되었다 하더라도 사랑에 나이가 없음을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초로'(初老)의 사전적 의미는 '늙기 시작하는 첫 시기, 주로 45~50세'를 지칭합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아직 젊은 축에 속합니다. 60이나 70이 넘어도 가슴 뛰는 사랑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어찌 사랑뿐이겠습니까? 자신의 삶을 서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학문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야기도 가치 있지요. 자신의 이야기를 함으로 서로를 도울 수 있는 바람을 일으키면 좋겠습니다. 바람개비는 바람이 있어야 그 가치가 드러납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바람개비라도 바람이 불지 않으면 그저 장식품에 지나지 않지요. 그러나 바람만 있고 바람개비가 없으면 바람개비가 만들어내는 그 아름다움 또한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 바람과 바람개비 둘이 만나서 서로 만들어내는 힘과 아름다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람이 만들어내는 1차 힘이 바람개비를 돌려 2차 힘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변화를 만들어내고 힘을 만들어내는 것은 서로서로 연결되어 연쇄적으로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코로나 19' 시간을 견디며 지내고 있지만, 이것으로 우리의 뛰는 가슴이 멈추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다시금 가슴 뛰는 일이 있을 것을 소망합니다.


1 이성숙, 『고인 물도 일렁인다』(소소담담, 2017), 40.

2 한비야,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푸른숲, 2005), 13.

3https://www.brainyquote.com/quotes/marc_chagall_389595https://www.google.com/search?q=marc+chagall&source=lnms&sa=X&ved=0ahUKEwiGz63rjc_UAhUUHGMKHQLtChcQ_AUIBSgA&biw=1227&bih=563&dpr=1.1

4 블레즈 파스칼, 이환역, 『팡세』(민음사, 2003), 83.

5 마이클 프로스트, 앨런 허쉬, 지성근옮김, 『새로운 교회가 온다』(IVP, 2009), 267, 268.

6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5991063

7 새뮤얼 이녹 스텀프, 제임스 피저, 이광래옮김,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열린책들, 2004), 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