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의 행보는 사랑의교회 중재와 차별금지법, 종교인 과세 등 한국교회 전체를 아우르는 차원에서 조명돼 왔다. 그러면서도 그는 담임하고 있는 용인 새에덴교회 목회를 전혀 소홀히 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공부'하는 목회자이기도 하다. '맨손, 맨몸, 맨땅'의 '3M'으로 시작해 오늘에 이른 소강석 목사로부터, 전편에 이어 교회와 설교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금은 준비하는 시기, 사람 키우는 사역에 집중
다른 교회 무너지면 우리도 무너져, 킹덤 빌더로
'다음 세대' 대신 '교회 세대', 구체적이고 현실적
-올해 교회 표어가 '사람을 세우는 교회, 킹덤빌더의 교회, 교회 세대를 잇는 교회'입니다.
"작년까지는 엄청 바빴는데, 올해는 부총회장으로서 총회장님을 섬기면서 비축하고 준비하는 중입니다. 요즘은 너무 튀어도 문제, 너무 조용해도 문제입니다(웃음). 그러는 동안 교회에서 사람을 키우는 사역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장사 중 장사는 사람을 남기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얻고 키우는 게 진정한 목회이자 사역입니다. 결국은 몇 명이 중요합니다. 대중은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사라지지요. 사람을 몇 명 키워놓으면 계속 함께 사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세우는 교회'입니다.
다음은 '킹덤 빌더'입니다, 예전에는 다른 교회야 어떻게 되든, 우리 교회만 부흥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지금도 예전의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목회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태계 원리를 알게 되면서, '다른 교회가 무너지면 우리 교회도 무너진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생태계의 원리입니다. 목회를 생태계 원리대로 하진 않지만, 그 정신을 풀어낸 말이 '킹덤 빌더'입니다. 우리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다른 교회들과 공적 사역을 함께함으로써 킹덤 빌더가 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부터 실천하고, 본격적으로 교단과 교계를 섬길 때는 만나는 사람마다 이런 의식을 심고자 합니다.
킹덤 빌더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면서, '교회 세대'를 이어가고자 합니다. '다음 세대'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지만, 다소 막연하고 사변적·철학적이고 포괄적이지만, 현실성이 떨어지는 느낌입니다. 다음 세대 강사들이 이성과 돈에 흔들리고 쓰러지는 건, 캐치프레이즈가 너무 막연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교회 세대'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 다음 세대를 이어가자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너지면, 기독교 가정도 없습니다. 영국·미국 교회가 여기서 무너졌습니다. 교회에서 젊은이들. 아이들이 믿음을 이어가자는 것이 '교회 세대'입니다."
전성기 오래 유지하기 위해, 젊고 역동적인 예배
열정 유지 위해 불붙는 소명감과 뿌리깊은 영성
新설교학, 설교자의 격조보다, 자연스러움 강조
-사역의 전성기가 왔다고 생각하시나요. 계속 열정을 잃지 않고 달려나갈 수 있는 비결이 궁금합니다.
"교회든 사역이든, 생체 리듬이 있습니다. 처음은 생성기입니다. 교회라면 개척하는 시기입니다. 다음은 도약기, 성장기, 다음 절정기입니다. 그런데 '고난은 길지만, 영광은 짧다'는 말처럼, 절정기는 짧습니다. 절정기가 지나면 정체기가 있고, 쇠퇴기, 그리고 사멸기가 따라옵니다. 인간도 그렇고, 제 사역도 그럴 것입니다. 저는 이제 막 전성기에 진입하려 한다고 봅니다. 어쩌면 전성기에 와 있는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전성기가 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웃음).
제 목회에서는 이 전성기가 길게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전성기를 길게 하려면, 제 마음이 한없이 젊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교회를 젊게 유지하려 하고, 예배도 역동적으로 드리려 합니다. 예배와 설교가 정형화되면, 반드시 화석화됩니다. 매뉴얼만 있을 뿐, 생명력과 동력이 사라집니다. 전성기를 길게 가려면 먼저는 초심, 두 번째는 진심, 그리고 중심입니다. 요즘 정치도 교계도, 중심을 잃어버려서 양 극단으로 가는 것입니다. 계속 열정을 유지하려면 불붙는 소명감과 뿌리깊은 영성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초심, 진심, 중심을 만들고, 지치지 않는 동력이 됩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와는 확실히 다릅니다. 신선하다고 할까요.
"이전의 설교학은 '복음을 어떻게 잘 전할 것인가'에 집중됐고, 이를 전달하는 형식과 의식을 강조했습니다. 설교자는 우아하고 격조가 있어야 했습니다. 설교도 대부분 정형화됐습니다. 정형화까지는 좋았습니다. 구조주의와 권위주의 시대였으니까요. 전통적인 설교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형식을 파괴하자는 신(新)설교학이 등장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흐름과도 맞았습니다.
물론 복음의 내용은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신설교학은 '첫째, 둘째, 셋째'처럼 대지를 나누지도 않고, '서론, 본론, 결론'을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무슨 제목으로 시작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런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정형화된 설교입니다. 신설교학은 어디서부터 시작해 어디서 끝나는지 모릅니다. 내러티브 설교라고도 하는데, 판을 깔아놓고 메시지를 집어넣습니다. 설교자의 우아함과 격조보다, 자연스러움을 강조합니다.
책 <하나님의 어릿광대(CLC)>가 이를 잘 설명합니다. 그들은 설교를 언어학적 측면에서 접근하자고 주장합니다. 설교도 결국 언어라는 것이지요. 언어행위는 크게 세 가지 단계로 이뤄진다고 합니다. 단순 발화행위, 의미수반 발화행위, 그리고 효과수반 발화행위입니다. 설교에 있어 단순 발화행위(locutionary act)는 성경 내용만 전달하는 것입니다. 의미수반 발화행위(the illocutionary act)는 이 성경이 왜 기록됐는지, 시대적 배경은 무엇인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등을 말합니다. 대부분 설교는 여기까지 나아갑니다.
여기에 효과수반 발화행위(the perlocutionary act)는 현장에서 회개를 하든 눈물이나 폭소를자아내든 현장에서 반응, 즉 '언어 사건'이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언어학에 따르면, 설교가 효과적으로 전달되면, 그런 행위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설교를 통해 의미 수반과 효과수반 발화행위가 이뤄지고 있을까요. 그러므로 설교는 총체적 언어 행위가 돼야 하고, 나아가 총체적 예술 행위로까지 승화돼야 합니다."
설교, 광대처럼 단순 언어 넘어 예술 행위 승화를
하나님 사랑의 극치, 복음의 감동 극대화 위하여
불신자들도 아는 대중가요로 하나님 마음 표현해
-그런 본인의 설교를 '광대 설교'라고 명명한 적도 있으시지요.
"<하나님의 어릿광대> 저자들은 설교자들을 '광대'라고 합니다. 말씀드렸듯 언어 행위를 넘어, 예술 행위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차원이지요. 광대가 무엇입니까. 진정성, 진심, 에토스(ethos·감정적), 그리고 '자기 비하'를 의미합니다, 설교에서 우아함이나 격조보다 중요한 것이 '자기 비하'입니다. 청중을 향한 진심이 있다면, 자기를 낮추고 깨뜨려서라도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할 것입니다.
설교자의 삶과 인격과 언어를 통해 진정성을 갖고 설교를 전달하면, 효과수반 발화행위가 나타날 것입니다. 설교자는 단순히 언어를 전달하는 것만으론 안 됩니다. 총체적 전달을 위해 감정과 제스처가 필요하고, 예술 행위까지 이뤄져야 합니다. 그 예술 행위란 때로 예전 부흥사들처럼 춤을 추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聖)과 속(俗)으로만 구분한다면, 설교 시간에 대중가요를 불러선 안 될 것입니다. 어떻게 거룩한 강단에서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성과 속을 구분한다면, 설교에선 정치 이야기도, 세상의 예화도 할 수 없습니다. 유머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세상의 이야기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처럼 설교자의 언어 행위는, 때로 성과 속을 초월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을 드러내고 복음을 강화시키며, 청중을 감동시키려면, 때로는 대중가요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과 교감하고 정서적 부분들을 깊이 있게 터치하기 위해, 하나님 사랑의 극치, 복음의 감동을 극대화시키기 위함입니다.
설교를 격하시키고 만담처럼 세속화시키려고 작정하는 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을 전하고 복음으로 청중을 울리려면, 이선희 씨의 노래 '나 항상 그대를'을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부릅니까?'라고 하겠지만, 호세아 선지자의 메시지나 탕자 이야기를 전하면서 하나님 마음을 전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설교자는 광대가 됩니다. 불신자들도 잘 아는 대중가요로 하나님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선희 씨의 다른 노래 'J에게'를 부르면서, 교회를 떠난 성도들이나 전도 대상자들을 J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가락동 개척 시절, 한 많던 성도들 앞에서 보듬고 품어주기 위해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남진 장로님의 '오 그대여 변치 마오'를 '천국 갈 때까지 변치 말자'는 목양의 고백으로 사용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몸에 뱄습니다.
제 고향이 전북 남원입니다. 판소리 문화에서 자라났습니다(웃음). 일반은총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비교하자면, 세상 예화는 '곡조 없는' 예화일 것입니다, 어쩌다 쓰는 대중가요는 '곡조 있는' 예화이고요. 이런 방법도 잘 써야지, 이것조차 형식화되면 설교는 세속화되기 쉽습니다. 중요한 것은 초심과 진심과 중심을 갖고, 하나님 중심으로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저 따라 부른다면, 그 설교는 정형화·화석화되고 강단을 천박하게 만들 것입니다."
목회보다 정치에 재미 느낄까... 성찰하는 기도
설교자로서 정서와 자아 파괴되지 않으려 기도
-마지막으로, 목사님의 기도제목이 궁금합니다.
"저도 인간입니다. 때묻을 수 있고, 정치꾼·모사꾼이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목회보다 정치에 재미를 느끼면, 명예와 교권의 노예가 되고 그 성에 들어가서 내가 누구인지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사역에 몰두하다 일 중독에 빠지면, 내가 누구인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뭘 달라는 기도를 하기보다, 성찰하는 기도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 저는 무엇입니까' 하는 기도입니다. 둘째로는 그러면서 항상 제 정서와 심리적 자아가 파괴되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결국 설교자의 자아가 파괴되면 설교가 파괴되고, 인간관계가 깨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음악과 시의 중요성을 모릅니다. 사람들이 왜 시를 씁니까? 고독을 이기고, 예술적 기쁨을 얻으며, 자연과 교감하고, 나와 남을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건강한 자아상에서, 건강한 영성도 나옵니다. 설교자에게 정서적·심리적 장애가 있으면, 분명 목회 현장에서 드러납니다. 저는 시를 쓰고 음악을 좋아합니다. 등산을 하면서 사색하고, 문화예술인들을 존중합니다. 좋은 노래를 부르는 대중가수들도 존경합니다. 음악 없는 세상이 있습니까? 여의도(국회)도 음악이 없어서 깨지는 것입니다.
유럽에서는 여야가 함께 음악회를 엽니다.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다가도, 음악의 화음처럼 조화를 이룹니다. 우리나라는 그게 없지요. 목회자들도 음악을 도구로만 쓰지, 삶에는 사용하지 않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남아공의 만델라가 종신형을 받았을 때, 영국에서 세계적 성악가 80여명이 석방 기원 음악회를 열었습니다. 그 음악회를 8월에 했는데, 이듬해 3월 만델라가 석방됩니다. 그것이 '음악의 힘'입니다.
목회자들이 찬송을 도구로만 사용하는데, 그래선 안 됩니다. 저는 설교 중에도 찬송합니다. 대중가요 스타들을 만나보니, 수준이 '대기권 밖의 광대'입니다.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복음도 있는데, 오히려 우리보다 더 소통과 감동을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박스화·교리화해서 감동이 없어졌는데, 그들은 정말 대단합니다."